올해 초 사법연수원 41기와 로스쿨 1기의 법률시장 배출을 앞두고, 언론에서 앞다투어 변화된 현실을 전하기에 바빴다. 논지는 대체로 '경쟁심화', 속된 말로 좋은 날은 다 갔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법연수생이나 로스쿨 졸업생이나 차이가 없다니 사실 서로 싸울 일도 아닐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기사를 두고 속이 쓰린 것은, 단지 좋은 날 다 지나고, 주변 사람들이 몰래 고소한 웃음을 짓기 때문만은 아니다(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정말 속이 쓰린 것은 로스쿨 도입이라는 사법제도개혁 취지와 다르게 모든 기사가, 소위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사시합격생" 혹은 "로스쿨졸업생"의 취업현황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스쿨 도입은 사법제도 개혁이라는 대의보다 성공이라는 우리의 근원적 욕망에 연결된 문제일지 모르겠다. 아니, 나는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마 앞으로의 어떠한 보완책도 할 성공적일 수 없을 것이다.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로스쿨 도입에 대한 쓴 소리를 발견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6557.html). 눈을 의심했다. 아니, 한겨레가?? 사실 로스쿨 도입은 개혁진보진영에서 더욱 기를 쓰고 찬성하기는 했었다(유일하게 민주주의법학연구회에서 반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진보진영에서 로스쿨을 비판하기에는 사실 껄끄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도입도 몇년 되지 않은 제도를, 게다가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첫 졸업생을 배출한 마당에 실패라느니, 애초에 문제였다느니, 이런 말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가지로 예견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애정어린 비판과 감시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안타까움이 있다. 

이미 로스쿨이 도입된 마당에 그 도입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최소한 도입취지와 목적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로스쿨 도입이 이러한 목적 외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자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로스쿨에 애정이 있다면, 아니 최소한 사법제도개혁의 취지에 공감한다면 도입취지와 목적에 기반한 비판을 멈추지 말 것이며, 이를 귀기울여 들을 일이다. 로스쿨을 반대하기에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애초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을 놓고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그 논의가 시작한 이래 수많은 제도가 제안되었다. 애초 그 논의가 시작되던 당시에는 문민정부의 특성상 "세계화"라는 대의 하에 논의가 전개되었다. 물론 단순히 저 "세계화"라는 말을 희화화할 것만은 아니다. 세계적 추세에 뒤졌다는 것은 제도의 형태만이 아니라, 역사적 역할과 그 내용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법조양성 시스템이 개혁되어야 함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 논의는 지지부진한 채, 발본적 개혁보다는 사법시험 합격자 증원이라는 꼼수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1981년 합격자를 300명으로 확정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500명으로 증원한 이래 매년 100명씩을 늘려 2001년 합격생 1000명 시대가 이루어졌다.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변호사 수가 증가한 이상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도외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역대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참여정부 하에서 사법개혁이라는 대의를 내세웠을 때,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로스쿨 도입 전까지의 법조인 양성 시스템은 주지하다시피 사법시험이라는 선발제도와 사법연수원이라는 교육제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라고 지적된 가장 큰 부분은 사법시험이 기존의 법학교육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유일 선발체제인 점이다. 즉, 대학에서 어떤 법학교육을 배웠든지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법시험 형태에 맞는 수험공부를 반복해야 하고 게다가 사법연수원에서의 새로운 실무교육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법과대학은 개입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는 우리 법조양성 시스템이 공교육 현장이 아닌 사교육 현장에 의존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도덕적 반성을 가져왔다. 뻔히 대학에서 법학을 배웠음에도 법조인이 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면 사법시험 정도는 (합격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마 대학에서 4년을 법학을 공부했더라도 그 지식만으로 사법시험에 응시한다면 1차 시험 성적이 50점이 채 안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대개 1차시험 합격 컷은 70점에서 80점 초반 사이이다). 그만큼 대학교육과 법조양성제도는 괴리되어 있다.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이 그랬다는 말이다. 

대학의 전공수업시간 안에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것은 법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사법시험이 최소한 질의 문제가 아닌 양의 문제로서 첫 단계를 걸러낸다는 것에 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대학 4년간 최소한 민법 전부를 강의들어본 바 없다. 모든 교수는 해당 범위를 다 끝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거의 채권총론의 총론만 강의하다 끝난 수업도 있다! 아마 단순히 내가 수업을 통해 들은 민법의 양적인 측면을 계량한다면(정말 개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법시험 출제 범위의 1/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만 놓고 본다고 해도 1/4 정도가 아닐까. 민법이라는 단일법을 6개의 수업에 나누어 들었음에도 이 정도이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 한 개인이 대학에 의존하는 부분이 이 정도라면 어느 누구도 굳이 법학과에 가서 여기에 열중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법학교육의 파행의 원인이며 법학교수의 수치인 셈이다.

그렇기에 과거 대안으로 제시된 거의 모든 제도가 실상 대학교육과의 연계 회복을 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효율성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도덕적 측면의 문제를 위해서도 제안된 것일테다. 공교육의 수치를 만회해보고자 하는 것이 로스쿨제도 도입의 중요한 일면이다. 우리 시대의 법조인은 독학(실상은 거의 사교육)으로 자생한 존재가 아닌 사회가 길러낸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오늘은 이 부분만 짧게 논하고 마쳐보자. 그런데 현재 로스쿨 도입이 정말 이 공교육의 수치로부터 벗어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아니, 본질적으로 이런 현상은 왜 발생했는지부터 설명해야 겠다. 왜 과거 대학교육은 법조양성제도와 괴리되었던 것인가?

혹자는 대학법학의 실무와의 괴리를 문제삼는다. 이론위주의 수업으로 법조 실무와는 너무나 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대학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는 다음 기회에 논해 보기로 하자). 이에 비해 사법시험은 상대적으로 판례위주의 문제이다보니 실무의 다양한 현안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사법시험이 과연 실무와 큰 연계성이 있는가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실무에서 판례를 그대로 암기하고 있는지가 과연 중요한가? 현대와 같은 정보화사회에서 판례검색을 하면 다 나오는 내용을 굳이 암기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사법시험도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이론에 목매어 있지는 않은가? 예컨대, 형법에서 매우 중요한 착오론을 생각해보자. 이론의 중요성은 차치하고 과연 이것이 현실적합성이 있는 논의인가? 이것과 관련된 판례는 정말 극소수이다! 그말은 이런 일은 현실에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법시험도 법조인양성과는 괴리되어 있는 제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우리 사회의 어떠한 공적교육, 선발시험도 법조인 양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괴리가 발생했는지는 왜 사법시험이 어려워졌는지의 문제와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조인이 될 사람을 걸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법조인이 될 사람을 걸러내야 하는가? 그것은 기존의 법조인에게 있는 엄청난 특권이 소수(최대 1000명)에게밖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공정하게 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이제는 사법시험이란 왠만한 배경이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처럼 절간에 들어가 독학을 하는 대신 신림동 고시학원에 등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 최소한 내가 아는 그 누구도 신림동 학원의 도움 없이 이 시험을 통과한 이란 없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황당한 고비용 체계는 한 곳이 더 있다. 수험시장이다. 말하자면 법조인 양성제도가 마치 수험시장처럼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평등에 대한 의식이 사뭇 강한 편이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피폐해진 삶에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건강한 신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일류대학, 고시합격이라는 신분상승이 긍정되었던 것도 아이러니하게도 도저한 평등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극소수의 법조인에게 주어진 특권이 긍정되었던 것도 사법시험이라는 제도가 지닌 극도의 평등성 때문이다. 아마 실존하는 평가체계 중 이만큼 공정에 대한 시비가 없는 시험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법시험은 지나칠 정도로 어렵게 진화되었다. 난장판이다. 법조인이라는 존재가 이 정도의 지적수준을 요구하는 직업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 법조인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돈과 밥의 문제이다. 법조직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법조인양성 제도개선도 성공할 수 없다. 왜 국민들이 사법연수원 수료생과 로스쿨 졸업생의 월급에 관심이 가는 것일까? 그것은 대기업 초임자의 월급 비교 기사나 다를 바 없다. 그것이 사회적 공기이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법제도개혁이라는 대의 때문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대한 고려 없이 제도개혁을 논하는 것은 순진한 것이든, 환상적인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무의식-의식의 근저에 있는 사법제도 개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법조인이 누구냐라는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양성할 것이냐는 차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조섞인 말로 사법시험이든 로스쿨이든 관심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법시험과 로스쿨입학을 준비하는 수 만 명의 준비생들과 그 가족들에게만 유의미한 문제일 뿐이다. 누구도 왜 이러한 개혁이 이루어진 것인지 그 목적과 취지를 알지 못한다. 단지 사법시험 합격해서 거들먹 거리더니 꼴좋다는 반응이고, 로스쿨 입학해서 판검사 다 된 것처럼 굴더니 꼴좋다는 식이다. 법조인 자체만이 아니라 법조인이 되기 위한 과정 자체도 대다수의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법조인이란 누군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를 단순히 추상적인 논의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를 통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법개혁도 없다고 본다. 옳든 그르든, 과거에는 법조인이란 신분상승의 공정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는 6, 70년대의 산물일 뿐이다. 21세기 우리의 법조인상이 이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 모두의 인식이 여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꼬이고 있는 것이다. 

로스쿨 입학이 어려운 것은 사법시험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몰라도 사법시험이 없어진다면 똑같이 최고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수험시장에서 일류대학 입학이라는 경쟁을 뚫고 다시 그 중 최고의 학점이라는 경쟁을 뚫고 다양한 스펙 확보라는 것을 갖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로스쿨 입학이 어렵다는 말은 로스쿨 출신 법조인도 특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 점에서 법조양성 제도는 전혀 개선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입학 정원이 문제인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정말 본질은 법조인이 누구냐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법조인은 우리 사회의 0.05% 정도밖에 안 되는 초일류계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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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무지하다면 무지할 수도 있고, 객관적이라면 객관적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계속 기사가 나오길래 모자라더라도 우선 한 마디를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쓴다.

1. 허재현 한겨레 기자와 진중권 씨가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당 영화를 놓고 트위터 상의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여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과연 이 영화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둘 다 아니다.

이 부분을 허재현 기자도 진중권 씨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분명히 그렇게 표현했다. 두 사람 간의 관점은 무엇을 본질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 이게 100% 허구다, 진실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그럼에도 누리꾼들이 지나치게 논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간 진중권 씨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건대, 그의 취지는 영화라는 다분히 정보전달만이 아닌 감정전달이 주요한 매개체를 사용하여 마치 사실의 재구성이라는 홍보로 당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재판이 긑난 이상 저널리스트나 학자의 영역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를 영화화하여 대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그가 자주 감정과잉으로 정치선전을 반복한다고 비난하는 나꼼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 몫하고 있겠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의견을 쓰고 싶다.)
반대로 허재현 기자는 당 영화의 법정에서의 변론장면들은 최소한 재판기록에 기반한 것으로 단순히 감정적으로 "사법부 나쁜 놈"을 말하고 싶어서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는 일부 픽션이 가미된 사회고발적 영화로서 '문제의식'을 알아달라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 있다 생각한다. 물론 서로 서 있는 지점은 다를 지 모르지만 어쨌든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진중권식으로 하면 영화보고 와서 "사법부 졸라 나빠, 다 없애버려" 이러지 말라는 것이고, 허재현 식으로 하면 "영화니까 이렇게 한 거지 뭘" 이라고 끝나지 말라는 것일테다. 제발 감정은 갖되 이성은 지키자. 제발 이성은 갖되 똑똑한 척 하지 말자.


2. 그런데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 박훈 변호사, 박홍우 부장판사, 당 재판의 재판부는 이 사건이 영화화됨으로써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당 영화는 영화 <도가니>와 가장 많이 비교되고 있다. 그만큼의 사회적 파장과 공분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도가니열풍처럼 당 영화의 당 재판도 재심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당사자들로서는 매우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박훈 변호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 싸움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김명호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박홍우 부장판사는 어떤 식이었든 사실상 범죄의 피해자이다. 그가 판사라고 해서 그 사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가 판사였기에 제 식구 감싸기에 의해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에 대한 감정적 만족에도 그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정말로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본질은 범인에 대한 책임에 맞는 처벌이다. 이점에서 박홍우 판사가 어떤 이득을 본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끝나버린 재판, 특별히 재심이 필요할 정도로 범죄적 정황이나 오류가 엿보이는 재판이 아니었던 이상, 이들에 대한 관심은 다큐 이상의 관심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의 한 축을 이루는 사법부는 다르다. 사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재심을 하라는 청구가 아니라, 앞으로의 재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사법부에게 사실확정과 법적 판단의 전속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권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권세를 의미하거나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권위는 사회의 합의로 주어진 것이기에 권위에 합당하지 않다면 권위를 빼앗기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면 사법부가 놓여진 문제상황은 이것이다. 사법부에서 서둘러 해명자료를 돌리는 것이 비록 대중의 감정적 선동경향 때문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해명도 변명 이상이 아니게 된다.
고집불통의 원칙주의자에게 그다지 모질게 재판할 이유가 있었던가. 그런 정도의 사법부라면 조폭에게는, 장애인에게는, 무학자에게는, 하층민에게는, 여성에게는 등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김명호 교수가 떼쟁이이기에 재판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송지휘권이란 권세와 권위주의의 산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판사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울고 짜고, 싸우고 다투는 이들이다. 못 배우고 답답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판사에게 권위를 준 것이다. 판사가 입정할 때 방청석까지 기립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귀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법적 효율만이라면 우리는 이런 재판을 뒤집어 엎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법부에게 지혜가 있기를 소망해본다.



3. 당 영화를 보러 가시는 분들은 꼭 이런 점을 염두하셔서 단순한 분노에 그치지 마시길. 행동하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