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8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고 있다. 그 구조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그의 은혜와 능력을 시전하셨는데, 그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서도 돌아서 죄의 길로 가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는 이들을 수시로 죽이고 엎어지게 하셨음에도(31절) 악인은 계속해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훼손하고 대적하는 공동체로 만든다. 그러나 그 악인은 죽는다. 악인의 싹은 제거된다. 그럼에도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악이 다시 공동체를 더럽힌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악에 관한 일종의 신화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현듯 나타난, 창조세계에 불현듯 나타난 뱀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도대체 악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왜 부활하는가.

물론 이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논쟁이 존재하며, 이것은 아직도 난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론이 아닌 현실이다. 우리는 계속 부활하는 악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악이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이 그 악이 될 것이라는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결을 가지고 살아왔던 누군가는 나와 똑같이 악이 되어 하나님을 더럽힌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 하나님의 신화는 부활을 사이에 둔 경쟁적 이야기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악을 도말하신다. 그러나 악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부활한다. 하나님은 영존하신다. 하나님은 강하시다. 악은 단명한다. 악은 결론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악은 부활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카운터파트가 된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카운터 펀치가 그리스도다. 하나님도 죽는다. 하나님도 약하다. 그러나 부활한다. 부활은 원래 하나님의 무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도 하나님의 무기라는 사실을 보이심으로써 악은 유일성을 상실한다. 신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악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렇기에 악은 정의를 지각하는 가운데 죽는다. 그리스도가 죄를 지각하는 가운데 죽음으로써 죄를 포괄하였듯이. 악은 죽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죽음의 지점에서 하나님과 악은 화평을 누린다.

둘. 하나님의 신화는 인간과 악의 관계 또한 말해주고 있다. 악은 분명 신적 속성을 가진, 까놓고 말하면 신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신으로 지칭하며(시편 82:6) 신들가운데 거하신다(시편 82:1). 하나님께서 신을 창조하셨는데, 그 신은 어느 순간 악과 일체화가 되어 있다. 우리는 창조신화를 빌어 우리 스스로가 악이 아님을 변호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말하기를, 네 자신이 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소망하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과 싸우고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분노와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죽이신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정의를 지각하며 부활을 소망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 모자란 신을 교화하고 양육한다. 악을 먹이고 기르신다.

하나님의 신화는 하나님과 악, 그리고 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악을 방관하고 허용하고 돌보신다. 하나님과 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념적 경계짓기는 우리 스스로를 유치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거대한 기획을 숨겨준다. 도대체 하나님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편으로 계속 포섭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비록 악의 세계로 건너오실 지라도. 아니 그렇게 보일지라도-실상은 가만히 계심에도.

(이상 초 관념적인 글 끝.)



로마서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에서부터 유래되어 개혁주의자들에게 전수된 전통적 관점과 20세기 후반의 일단의 신학자들에게서 개진된 새로운 관점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이 글은 『로마서(WBC주석), 제임스 던-새로운 관점』, 『로마서의 신학적 강해』, 더글라스 무-전통적 관점, 『로마서 듣기』, 최갑종-전통적 관점 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우선 전통적 관점에서는

1. 로마서는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롬 1-4장이 핵심이다.
2. 그 구원은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비판하기를,

1. 초대 교회 당시에는 내관적(introspective) 경향이 없었으며(즉, 개인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며), 이는 근대 이후 서구 관점에서 로마서를 보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다. 대신 바울은 당대 초대교회에 압도적인 이방인의 수적 우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서의 핵심은 9-11장이다.
2. 이신칭의의 교리는 루터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며, 유대교는 전통적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적 포섭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대신 유대교가 강조한 것은 그 구원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율법을 실천할 것이 강조되었다(언약적 신율주의-율법주의가 아님).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한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서 새로운 관점이 제시하는 바는 전통적 관점이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에 집중해서 교회론적-공동체적 관점을 도외시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믿음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행위의 문제를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새로운 관점은 로마서 읽기에 있어서 실천론적이고 사회학적인 함의를 가져옵니다.

이에 대해서 더글라스 무는 전통적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의 일부를 수용하는 절충적 태도를 보입니다.

1. 로마서가 구원의 문제보다 민족의 문제를 중심으로 삼았다기 보다, 로마서의 전반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후반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 관계를 다룬 것으로서, 후자는 전자에 종속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2. 전통적 관점에서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로 오해한 것은 오류이다. 그러나 분명 유대인들은 율법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바울이 비판한 율법은 단순히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하는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의 무의 관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서 로마서를 읽을 때는 실천론적이고 사회학적인 통찰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관점이 제시하는 해석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작년에 학교 캠퍼스를 거닐다가 하루에 전도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는 분의 모습이나 전단지를 보니까 같은 단체이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입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해도 붙잡기도 하고, 어떻게 전도하나싶어 궁금하기도 하여 "전도를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던 분들은 청년목회로 유명한 모 교회 지체들이었습니다. 당시가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 기간이라 아마도 장래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자를 만났을 때 분명히 기독교인이고 교회를 잘 다니고 있다고 말했음에도 그 지체는 제게 "전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라는 것이 순전히 교회 자랑이었는데, 무엇무엇이 너무 재미있다느니, 청년이 많아서 너무 재미있을 거라느니, 재미를 빼면 사실 들은 "도"가 없었습니다.

 순간 기분이 좀 나빠서 저는 교회 잘 다닐테니까, "전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멀리서 그 분이 다른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열에 아홉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 자랑이요, 교인 빼가기 였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담임목사님 자랑도 하셨는데, 목사님께 어떤 복음을 받았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대적으로 칭찬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리스 지방의 본(model) 교회라고까지 칭하고 있습니다(7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 "재미있게" 지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일으키고, 사랑으로써 수고하고 헌신하기를 아끼지 않으며, 소망으로써 어떠한 고난도 감내하고 살아내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런데 그들이 확실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러한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말로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이되었고,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종과 같은 모양으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5절).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닮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있습니다(6절). 그래서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온전하여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애쓰고 수고하고 인내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러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한 명의 사람도 그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4절).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새벽이슬은 선교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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