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의 대안체제들은 사라지거나 미비. 이러한 상황은 체제이데올로기 경쟁의 승리가 아님. 아직도 반민주적 운동이 여전하고 민주주의는 위기상태에 있음.

 

2. 전세계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transition), 공고화(consolidation), 심화(deepening)의 도전을 진행 중임.

 

3. 민주주의에 대한 25세기 동안의 토의는 그 개념에 대한 혼란과 이견을 조장하였는데, 이는 민주주의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녔기 때문임. 게다가 민주주의는 실재하는 것이 된 역사도 짧으며 오랜 시간 동안은 이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뿐임. 따라서 이 책 또한 20세기의 민주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 이를 기초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임.

 

<아...>

 

1. 민주주의는 체제이론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이상주의를 담고 있음. 따라서 여타의 체제이론이 갖는 함정처럼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옳아'라는 결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뒷장에서도 다루겠지만 우리는 이론이 어떻게 현실과 조우하는가를 다루어야 하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론일 것. 그 점에서 우리의 논의가 20세기의 산물이라고 한정짓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것임. 더불어 18세기는 18세기의, 기원전 5세기는 기원전 5세기의 논의라고 직시하는 것도 중요함.

 

2. 현대민주주의론의 중대한 주제 틀. 이행-공고화-심화.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과 논문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의문만을 표시하고 넘어가자. 이 주제 역시 우리가 지금 서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우리사회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화단계에 들어선 것인가? 불과 우리의 민주주의가 30년이 채 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3. 결국 민주주의론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그 논의를 하는 바탕에 깔린 개념에 얼만큼 동의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이 동의를 위한 논의는 추상적인 부분에서 시작해야 할 것.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론은 정치체제론을 넘어서 사회이론 혹은 철학이라고 까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시편 78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하고 있다. 그 구조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그의 은혜와 능력을 시전하셨는데, 그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서도 돌아서 죄의 길로 가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는 이들을 수시로 죽이고 엎어지게 하셨음에도(31절) 악인은 계속해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훼손하고 대적하는 공동체로 만든다. 그러나 그 악인은 죽는다. 악인의 싹은 제거된다. 그럼에도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악이 다시 공동체를 더럽힌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악에 관한 일종의 신화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현듯 나타난, 창조세계에 불현듯 나타난 뱀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도대체 악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왜 부활하는가.

물론 이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논쟁이 존재하며, 이것은 아직도 난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론이 아닌 현실이다. 우리는 계속 부활하는 악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악이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이 그 악이 될 것이라는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결을 가지고 살아왔던 누군가는 나와 똑같이 악이 되어 하나님을 더럽힌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 하나님의 신화는 부활을 사이에 둔 경쟁적 이야기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악을 도말하신다. 그러나 악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부활한다. 하나님은 영존하신다. 하나님은 강하시다. 악은 단명한다. 악은 결론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악은 부활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카운터파트가 된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카운터 펀치가 그리스도다. 하나님도 죽는다. 하나님도 약하다. 그러나 부활한다. 부활은 원래 하나님의 무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도 하나님의 무기라는 사실을 보이심으로써 악은 유일성을 상실한다. 신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악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렇기에 악은 정의를 지각하는 가운데 죽는다. 그리스도가 죄를 지각하는 가운데 죽음으로써 죄를 포괄하였듯이. 악은 죽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죽음의 지점에서 하나님과 악은 화평을 누린다.

둘. 하나님의 신화는 인간과 악의 관계 또한 말해주고 있다. 악은 분명 신적 속성을 가진, 까놓고 말하면 신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신으로 지칭하며(시편 82:6) 신들가운데 거하신다(시편 82:1). 하나님께서 신을 창조하셨는데, 그 신은 어느 순간 악과 일체화가 되어 있다. 우리는 창조신화를 빌어 우리 스스로가 악이 아님을 변호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말하기를, 네 자신이 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소망하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과 싸우고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분노와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죽이신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정의를 지각하며 부활을 소망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 모자란 신을 교화하고 양육한다. 악을 먹이고 기르신다.

하나님의 신화는 하나님과 악, 그리고 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악을 방관하고 허용하고 돌보신다. 하나님과 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념적 경계짓기는 우리 스스로를 유치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거대한 기획을 숨겨준다. 도대체 하나님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편으로 계속 포섭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비록 악의 세계로 건너오실 지라도. 아니 그렇게 보일지라도-실상은 가만히 계심에도.

(이상 초 관념적인 글 끝.)

[Get Real]Sugar-Deez(2010) 음악 2012. 10. 17. 16:31

봄, 가을, 일산, 호수공원

이런 것들이 기억나게 되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