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세광교회 청년2부 클럽에서 있던 논쟁에 대한 의견 제시로 쓴 것입니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두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 최바울 선교사님 :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1274598
2. 양희송 실장님 :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65


와우~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화끈한 논쟁이 붙었군요~
그냥 지나가려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서 저도 한 글자 남겨봅니다~
(철야 끝나고 자야 되는데 요 며칠 새 매일 과제로 밤을 샜더니만~;;)
상호간에 원색적 비난이 아니라 합리적인 토론이라면 얼마든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왜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과연 그것이 옳은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견해가 다른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글을 남기신 거의 모든 분이 이에 동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과 구원의 길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논쟁은 그 “방법”이라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2. 또한 한 가지 더. 이것이 새생명축제에 관한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것은 당위라기보다 희망사항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마땅히 복음 전하기로 마음을 먹은 마당에 우리의 의지가 꺾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3. 여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최바울 선교사님이나 양희송 실장님의 글이나 우리 지체들의 나눔 모두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모두 땅 밟기라는 “방식”을 문제 삼습니다. 이를 다루기에 앞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4. 그것은 “복음”과 “전도”, “영접”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두현 형제의 마지막 글에 이를 해결해줄 좋은 단초가 보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알다시피, 아주 간단한 무미건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사 죄의 종이 된 우리를 그의 죽음으로 대신하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란 이러한 무미건조한 사실을 전하여 대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오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쳐야 함에도, 우리는 언제나 “영접”에 대한 갈망이 찜찜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4영리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든, 어떤 전도지든, 항상 말미에는 영접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항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무미건조한 사실에서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현 형제의 말마따나 우리의 전도는 언제나 “개종”의 시도로 읽히게 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기독교의 행태에 대해 복음영접 대신 복음에 청함을 받았다라고 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영접은 하나님과 그에게 달린 문제이지 우리의 손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이러한 우리의 오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복음을 받지 못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를 쓰고 그가 복음을 영접하기를 원하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듣지 않은 자는 여전히 불쌍한 상황에 있게 됩니다.(이것은 예전에 제가 모 선교단체 간사님과 캠퍼스에서 논쟁하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영혼에 대한 애처로움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도 그의 동족의 믿지 않음을 슬피 여겼거늘!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애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을 위하여 누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이방인!!! 바울은 유대인을 내치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의롭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9-11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도 복음을 이미 다 들었고, 그들을 내치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무미건조한 그 복음에, 하나님의 선택에 “영접”을 맡겼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억지로 사람들에게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6. 그러므로 전도와 관련한 우리의 모든 인간적 노력을 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복음 앞에 방관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하여 유대인을 시기케 해서 몇 명을 구원하려했던 그 전략이 우리의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복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복음을 여전히 율법에 매이게 하는 잘못을 매섭게 눈치 챘던, 그 바울의 광활한 복음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을 시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이제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렇다면 그 방식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양희송 실장님은 기독교에 뿌리박힌 “공격적 선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호성 형제님께서 적절한 반문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원래 공격적입니다. 한 인간이 그의 전 인격적 세계관을 대전환하는데, 어떻게 공격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문제는 그 공격이 하나님이 주체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격은 그냥 “공격”입니다. 하나님의 공격이 “선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공격하면 “선교”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공격이 “영적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육적 공격입니다.

8. 최바울 선교사님은 육적 공격, 소위 "공격적 선교"가 구약에 근거하고 있기에 올바르다고 말씀하십니다.그렇다면 구약 말씀은 왜 육적 공격을 찬양하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적 세계관의 전모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현실주의, 우리가 한 번은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성 형제님의 말씀대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율법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바로 육적 공격입니다. 너무나도 의롭고 선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끝이 불행한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실패한 길이라고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 7장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이 율법적 현실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님이 계신 신약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이 길을 한 번은 거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죄인임을 깨닫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끝까지 그러한 육적 공격을 추구한다면, 오직 모든 일에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어야 의롭다고 인정됩니다. 율법의 전부를 지키더라도 단 하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전부 지키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을 땅 밟고 싶으시다면 좋습니다. 대신 제발 청와대도 밟으시고, 삼성도 밟으시고, 미군기지도 밟으시고, 기륭전자 구 사옥도 좀 밟으시고 하십시오. 왜 우상은 절에만 있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조차도 다 밟지 못하였기에, 성령을 보내사 친히 그 땅을 밟으십니다.

10. 새벽이라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글이 막 써져서 실수도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에게 복음에 있어서 정말 율법적인 실천이 아니라 믿음의 실천, 복음적 실천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감할 수 없는 단조로운 사실이지만, 우리는 증인이기에 우리의 실천에 따라 그 복음이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복음적 실천이 제발 쪼잔하고 속 좁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11.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의견을 남기는 것은 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저를 포함하여~^^V). 최소한 그러한 믿음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신공격성 비난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봉은사에 간 찬양인도자 학교 지체들에게도 응원을 하고 싶었습니다. 무릎만 안 꿇었더라면, 홈페이지도 닫고 하지 않았더라면, 청와대 등등에도 갔었더라면... 그 뿐입니다.

작년에 학교 캠퍼스를 거닐다가 하루에 전도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는 분의 모습이나 전단지를 보니까 같은 단체이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입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해도 붙잡기도 하고, 어떻게 전도하나싶어 궁금하기도 하여 "전도를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던 분들은 청년목회로 유명한 모 교회 지체들이었습니다. 당시가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 기간이라 아마도 장래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자를 만났을 때 분명히 기독교인이고 교회를 잘 다니고 있다고 말했음에도 그 지체는 제게 "전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라는 것이 순전히 교회 자랑이었는데, 무엇무엇이 너무 재미있다느니, 청년이 많아서 너무 재미있을 거라느니, 재미를 빼면 사실 들은 "도"가 없었습니다.

 순간 기분이 좀 나빠서 저는 교회 잘 다닐테니까, "전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멀리서 그 분이 다른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열에 아홉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 자랑이요, 교인 빼가기 였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담임목사님 자랑도 하셨는데, 목사님께 어떤 복음을 받았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대적으로 칭찬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리스 지방의 본(model) 교회라고까지 칭하고 있습니다(7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 "재미있게" 지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일으키고, 사랑으로써 수고하고 헌신하기를 아끼지 않으며, 소망으로써 어떠한 고난도 감내하고 살아내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런데 그들이 확실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러한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말로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이되었고,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종과 같은 모양으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5절).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닮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있습니다(6절). 그래서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온전하여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애쓰고 수고하고 인내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러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한 명의 사람도 그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4절).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새벽이슬은 선교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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