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무지하다면 무지할 수도 있고, 객관적이라면 객관적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계속 기사가 나오길래 모자라더라도 우선 한 마디를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쓴다.

1. 허재현 한겨레 기자와 진중권 씨가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당 영화를 놓고 트위터 상의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여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과연 이 영화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둘 다 아니다.

이 부분을 허재현 기자도 진중권 씨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분명히 그렇게 표현했다. 두 사람 간의 관점은 무엇을 본질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 이게 100% 허구다, 진실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그럼에도 누리꾼들이 지나치게 논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간 진중권 씨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건대, 그의 취지는 영화라는 다분히 정보전달만이 아닌 감정전달이 주요한 매개체를 사용하여 마치 사실의 재구성이라는 홍보로 당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재판이 긑난 이상 저널리스트나 학자의 영역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를 영화화하여 대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그가 자주 감정과잉으로 정치선전을 반복한다고 비난하는 나꼼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 몫하고 있겠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의견을 쓰고 싶다.)
반대로 허재현 기자는 당 영화의 법정에서의 변론장면들은 최소한 재판기록에 기반한 것으로 단순히 감정적으로 "사법부 나쁜 놈"을 말하고 싶어서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는 일부 픽션이 가미된 사회고발적 영화로서 '문제의식'을 알아달라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 있다 생각한다. 물론 서로 서 있는 지점은 다를 지 모르지만 어쨌든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진중권식으로 하면 영화보고 와서 "사법부 졸라 나빠, 다 없애버려" 이러지 말라는 것이고, 허재현 식으로 하면 "영화니까 이렇게 한 거지 뭘" 이라고 끝나지 말라는 것일테다. 제발 감정은 갖되 이성은 지키자. 제발 이성은 갖되 똑똑한 척 하지 말자.


2. 그런데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 박훈 변호사, 박홍우 부장판사, 당 재판의 재판부는 이 사건이 영화화됨으로써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당 영화는 영화 <도가니>와 가장 많이 비교되고 있다. 그만큼의 사회적 파장과 공분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도가니열풍처럼 당 영화의 당 재판도 재심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당사자들로서는 매우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박훈 변호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 싸움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김명호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박홍우 부장판사는 어떤 식이었든 사실상 범죄의 피해자이다. 그가 판사라고 해서 그 사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가 판사였기에 제 식구 감싸기에 의해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에 대한 감정적 만족에도 그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정말로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본질은 범인에 대한 책임에 맞는 처벌이다. 이점에서 박홍우 판사가 어떤 이득을 본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끝나버린 재판, 특별히 재심이 필요할 정도로 범죄적 정황이나 오류가 엿보이는 재판이 아니었던 이상, 이들에 대한 관심은 다큐 이상의 관심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의 한 축을 이루는 사법부는 다르다. 사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재심을 하라는 청구가 아니라, 앞으로의 재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사법부에게 사실확정과 법적 판단의 전속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권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권세를 의미하거나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권위는 사회의 합의로 주어진 것이기에 권위에 합당하지 않다면 권위를 빼앗기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면 사법부가 놓여진 문제상황은 이것이다. 사법부에서 서둘러 해명자료를 돌리는 것이 비록 대중의 감정적 선동경향 때문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해명도 변명 이상이 아니게 된다.
고집불통의 원칙주의자에게 그다지 모질게 재판할 이유가 있었던가. 그런 정도의 사법부라면 조폭에게는, 장애인에게는, 무학자에게는, 하층민에게는, 여성에게는 등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김명호 교수가 떼쟁이이기에 재판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송지휘권이란 권세와 권위주의의 산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판사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울고 짜고, 싸우고 다투는 이들이다. 못 배우고 답답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판사에게 권위를 준 것이다. 판사가 입정할 때 방청석까지 기립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귀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법적 효율만이라면 우리는 이런 재판을 뒤집어 엎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법부에게 지혜가 있기를 소망해본다.



3. 당 영화를 보러 가시는 분들은 꼭 이런 점을 염두하셔서 단순한 분노에 그치지 마시길. 행동하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시길. 
오늘 황당하게 한미FTA가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수 년간 이 나라를 격론의 장으로 만들었던 그것이 정말 순식간에 정리되고 말았다.

한미FTA는 단순한 의안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아니, 법률안하고 견주어도 급이 다르다.

대한민국에 미칠 그 영향력에 대하여 아무리 보수적으롤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IMF와 맺은 조약 이후 최대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다.

IMF 당시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180도 바뀌었던 것처럼.

그렇게 대한민국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안을 이렇게 순식간에 날치기로 통과시키다니...

이게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선전하는 선진국의 모습인가...

정말.. 정말.. 한미FTA가 필요하다 손 치더라도

그것이 대의기구인 국회라는 최소한의 절차를 통해

국민적 합의로 비준될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갈 정도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우리 손으로 결정하는 권리마저 앗아갈 정도로 시급한 문제인가.

그렇게 이루어진 선진국이라면 나로서는 도무지 원하고 싶지도 않다.



덧붙여, 오늘 이 사태를 언론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여 MBC 9시 뉴스를 봤는데,

정말.. 이제 다시는 MBC뉴스 따위는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10분이나 다뤘을까? 그 중 대부분은 국회 난장판 얘기로 점철되고,

기억에도 안 남는 뭐가 중요한 지 모르겠는 몇 개의 기사들(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의 비준 이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심각성은 기자의 단 두 마디뿐.

MBC 뉴스의 연성화는 누구 탓인가.

이러고도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법무부는 로스쿨 1기생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그동안 질질 끌었던 변호사시험 합격자 결정 방법에 대해 최종적으로 확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변협에서는 총 정원의 50%로, 법무부는 응시자의 50%로, 로스쿨학생협의회는 응시자의 80%로 합격자 정원을 정해야한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즉, 변협안에 따르면 현행 사법시험과 마찬가지로 1000명을 선발하는 셈이 된다. 법무부안에 따르면 1천명에서 시작하여 매년 응시자에 따라 합격자가 늘어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에 비례하여 탈락하는 자도 누적된다. 로스쿨학생협의회의안에 따르면 일부 탈락자들을 감안하면 합격률을 보장하여 자격시험화 할 수 있게 된다. 이 안들 중에서 어떤 것이 채택될지가 향후 로스쿨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로스쿨학생협의회 쪽에서 단체행동을 보일 정도로 반발하는 것은 법무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법무부는 검사로 구성된 조직으로서 변협과 장기적으로는 직업적 이익을 같이 하는 집단이다보니 법무부의 분위기가 변협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 법무부는 사법시험 정원제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변협의 입장을 고려하여 획기적으로 정원을 늘리지 않았던 선례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법무부의 운신의 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렇다면 변호사 시험 합격자 정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법시험을 운영해 오던 법무부에게 당 업무가 맡겨진 이상 예정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법무부는 로스쿨이 조기에 파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문제를 미뤄왔던 것이고, 피해는 고스란히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로스쿨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것을 로스쿨 학생의 이기주의로 치부하기에 앞서, 과연 법무부가 로스쿨에 대한 사법개혁 취지를 고수하고 이행할 수 있는 집단인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심각하게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로스쿨 정책은 노무현 정부 하에서 법무부 장관에 소위 정치인들이 기용됨으로써 추진 가능했던 공약이었던 것이었기에, 현 정부들어 다시 검사 조직이 된 법무부로서는 직역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변호사시험 합격자 정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경인일보



로스쿨 도입의 정당성의 유무를 넘어, 최소한 사법시험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개혁을 시작한 것이라면 우선 그 취지에 맞는 운용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실질적으로 변호사 수의 획기적 증가, 변호사 시험의 자격시험화 등은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로스쿨이라는 이름의 사법시험이 반복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스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였기에 도리어 사법시험보다 더 비효율적인 제도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법무부는 변호사 시험 합격자 결정 방법을 정함에 있어 대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중요한 제도의 변경을 왜 그렇게 시급하게 처리했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일본 제도의 수용이 쉽게 이루어지고, 그 문제점도 유사하게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로스쿨 도입의 문제도 이와 판박이이다. 그러나 일본만 하더라도 로스쿨 도입까지 우리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검토하였으며, 우리와 달리 변호사 정원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었기에 현재의 타협적 제도 운영에 대해 크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는 로스쿨 도입 자체가 사법시험의 폐쇄성과 합격자의 일부 학벌 편중을 시정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일본식 제도 운영으로는 도무지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목표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식으로 로스쿨을 시행한 것은 이미 파행을 예정한 것이었다. 도대체 아무런 대비 없이 왜 이를 감행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에도 분명한 책임이 있음을 밝혀야 한다. 그들의 이상이 옳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급하게 이를 추진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제도가 형성되었고, 이제와서는 일부만의 개혁 성과라도 지키기에 급급하다보니 발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세 싸움으로 타협하기 일쑤인 방식을 자초하게 되었다.

더 근본적인으로, 과연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는 변호사 등의 법조직역을 어떻게 바라보았기에 로스쿨 도입 등의 해결책을 내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단지 특권적 직업이기에 이를 해체하는 것이 목적인가? 그래서 정원수를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참여연대 쪽 인사들의 칼럼을 보면 이런 표현이 많다. 변호사는 자격에 불과하므로 자격시험화하여 특권을 없애고, 정원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변호사 질 하락은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한다. 과연 이 말이 참여연대와 같이 진보적 단체에서 해왔던 말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왜 변호사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이렇게나 시장주의를 신봉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는 상법상 상인이 아니다. 즉, 쉽게 말하면 변호사는 영리추구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기에 의무적으로 대한변호사협회라는 공공단체를 구성하고 자동 가입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공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는 소송과 같은 공적 사무를 단지 시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법제에서는 변호사를 절대 시장주의에 개방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참여연대가 시장주의적 방법으로 법조직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체계정당성에 반하는 것으로서 해결책이 무엇인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변호사 직역의 공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로스쿨로 인해 앞으로의 법률서비스는 가격이 낮아질 것인가? 시민의 변호사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질 것인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이는 단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미미한 효과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미 사법시험 하에서 변호사 시장도 학벌과 경력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시장주의에 의할 때, 과연 시민들이 자신의 재산과 자유가 걸린 문제를 쉽게 아무 변호사에게 맡길 수 있을까?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서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판사를 거쳐 개업한 변호사와, 동일한 조건에 로스쿨을 나와서 판사를 거쳐 개업한 변호사가 있다면 평가가 같을까? 법조직역의 보수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이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 로스쿨이 완전 정착하고 수십년이 지나지 않는 이상 변호사 시장의 더 극단적 양극화가 일어날 뿐이다. 따라서 시장주의적 방식을 해결책으로 제시할 것이 아니라 변호사의 공익성을 강제할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스쿨과 같은 제도를 만들었다면 로스쿨 졸업생들부터 상당수를 공익변호사로 채용하여 저렴하고 질좋은 서비스를 국가 혹은 공법인에서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로스쿨 입학금 자체를 국가가 지원하여 로스쿨 졸업생들은 의무적으로 수 년간 공익활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방안은 어떨까? 어렵지 않은 법률분쟁에 대해서는 변호사들이 할당을 받아 처리하는 공영제를 운영하면 어떨까(버스공영제와 같이)? 이러한 공익성의 보완이 담보되지 않고 다수의 변호사를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현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항상 지적하였던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미국식의 로스쿨 제도를 도입할 것이 아니라, 독일식의 사법시험을 도입하는 것도 충분히 검토했어야 했다. 현 제도는 전문대학원을 소수 대학에 허용하면서 엄청난 등록금 인상과 오히려 학벌 특혜가 고착화되었다. 미국식 로스쿨 제도는  매년 로스쿨 순위를 발표하여 그에 따라 졸업생들의 장래가 결정되는, 그 자체로 줄 세우기와 친한 제도이다. 그럼에도 이를 학벌 편중을 위해 도입했다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SKY법학과를 대체하는 차기 학과가 대두된지 오래이다. 또한 로스쿨은 사법시험보다 더한 진입장벽이 되어 계급 고착화 현상이 우려되고 있다. 이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단지 장학금 확대가 아니라, 등록금 인하와 로스쿨 확대에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다.

반면 독일식의 사법시험은 법학과의 학부 과정에 이어 실무 과정 등의 기간을 붙여 학부 졸업생은 누구든지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또한 졸업생도 정해진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충실히 따라오면 누구든지 합격할 수 있는 자격시험이기에 특별히 무리한 준비나 비싼 학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학부를 포함하여 5, 6년의 교과과정으로 확대하여 로스쿨을 학부 내로 편입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학 수업의 파행을 막고 비용도 훨씬 저렴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예일 뿐이다. 방법은 많이 있다. 문제는 로스쿨이 능사는 아니었고, 현재와 같이 파행이 예견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랬다는 점이다.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이지만 앞 길이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안타까운 것은 로스쿨이 설치된 학내에서는 기존의 법대생과 로스쿨 학생이 나뉘어 반목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서로에 대한 도를 넘은 비방과 모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변호사 시험의 정원제 문제까지 터져나왔을 때 과연 로스쿨이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겠는지는 의문이다. 실제 학생들의 자퇴 동의서 제출 정도만 보아도 상당수가 이미 로스쿨의 매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법시험 출신과 로스쿨 출신의 실력 비교에 대해 이러저러 할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이미 비이성적인 논쟁으로 전락했다. 부디 같은 직역에 종사하려는 자들로서 예의를 지키고 법률가로서의 언행과 품위를 지켰으면 한다. 그리고 정말 로스쿨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를 기원한다.


- 2010년 나봇의 포도원,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12월 1일, 아직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 이 날,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체온과 날숨이 뒤섞여 뜨겁게 느껴진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이런 자리를 미리 마련하지 않았던지. 바로 홍대의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열린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에서였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의 사람들의 열기, 몇 개의 전구가 만들어낸 어두운 빛, 이런 것들이 합쳐져 작은 흥분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모인 초대교인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올해 4월 초까지는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예배가 두리반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채림 ·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두리반보다 더 외로운 곳으로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예배가 뜸하던 즈음에 성공회교 한용걸 신부님께서 외로이 매주 목요일마다 촛불 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전등도 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빛나는 몇 개의 촛불을 사이로 민중가요와 성가곡을 넘나드는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 예배만 드리면 눈물이 나더라고 쓸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두리반에 이번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래봤자 8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뿐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채림 집사님께서는 홍대 인디밴드들의 연합 공연 이후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감탄하셨습니다. 의자를 50여개를 깔아놓고도 뒤에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문 밖에서 예배드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번 자리는 통일시대평화누리, 새벽이슬, IVF사회부가 연합해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50여명을 예상하고 준비한 자리에 차고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두리반에 대한 애타는 죄송함이 많았던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예배는 유채림 집사님께서 기억을 복기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12월 24일 도시공항철도 역사 공사 지역에 편입된 두리반은 강제 철거를 당했습니다. 평생 모은 돈으로 겨우 연 가게를 포기할 수 없다는 안종녀 집사님의 눈물과 분노가 겁쟁이 남편을 움직인 동력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끝나가는 밤에 공사 가림판을 뜯고 들어가 “내 가게”를 되찾았습니다. 그들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대상도 아니어서 영업손실보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달랑 이사비 300만원을 받고 나가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들은 이 억울함 때문에 지난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다다라가는 지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채림 집사님은 작가이셔서 그런지 그들의 지난 투쟁의 이야기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 싸움입니다. 즉, 형이상학적 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두리반은 이기주의나 억울함의 감정을 넘어선 공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두리반은 오늘날 철거민들에 대한 이 사회의 잔인한 공격을 대표하는 곳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얼굴을 한 제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전이 불법적으로 단전을 하여서 무더위 속에 상한 음식으로 여름을 나야 했을 때도, 이제 추운 겨울이 다가와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때에도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에 대한 화답으로 구교형 목사님(성서한국 사무총장)께서 다니엘서 4장 19-27절 말씀으로 “내가 선 자리를 바로 인식하라!”는 선포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관점에서 느부갓네살의 자리가 어디인지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26절), 그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27절)입니다. 설교의 말미에 이 정권에 불의가 가득한 것은 우리가 공범인 때문이며, 인간의 법이 무너진 곳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의지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달구질을 하셨습니다.

ⓒ 정다정

 

이 시대의 불의가 중단되도록, 그리고 두리반에 위로가 있도록 기도할 때에, 고조되는 기도의 목소리들과 함께 참석자들이 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두 집사님을 축복하며 기도할 때, 행여나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기라도 할까봐 높이 손을 뻗어 하나님의 축복의 방향을 고정했습니다.

철거민의 눈물이 시작된 개발주의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용산과 두리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개발 입법이 얼마나 철거민들의 보호에 대해서는 무용한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헌법은 제23조 제3항에서 공익사업에 있어서 재산권의 수용 등이 있을 때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이를 완전한 보상이라고 해석합니다. 완전한 보상이라면 당연히 철거되는 한 점포로 하여금 인근에 다시 점포를 열어 사업구역과 단골 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77조에서는 단지 영업이익과 이전비용을 “참작”하라고 권유할 뿐입니다. 그래서 용산의 세입자들은 망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두리반은 공익사업이 아닌 민간사업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권리마저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인간의 관계이니 서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 작금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철거 용역이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철거를 강행해도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두리반의 싸움이 이기주의일 수 있을까요? 성경이 나봇의 개인적 사건을 들어 시대적 보편성을 갖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두리반도 우리에게 그러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사5:8) 개발주의야말로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이기주의입니다. 불의한 자본과 탐욕은 두 집사님의 거처를 좁은 건물로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의 활동과 소문들은 전국을 향해 퍼져 날리고 있습니다. 마치 사단이 예수를 좁디좁은 나무 위에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 보혈이 온 만물의 구원을 위해 흩뿌려졌던 것처럼, 두리반은 세상의 자유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두리반을 찾아 해방의 기쁨을 누리려는 많은 홍대의 인디밴드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은혜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과 정의로 불의와 탐욕에 맞서시기로, 형이상학적 전투를 벌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 다과로 시루떡을 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기쁜 날도 멀었는데 떡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잔치와 같았습니다. 함께 떡을 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두리반에서 만든 떡을 떼는 기쁨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연평도는 눈물의 땅이다. 서해교전이 일어난 곳도, 이번에 집중포격을 받은 곳도 연평도이다.

한반도 위로 포탄이 날아든 것은 1970년대 이후 최초라고 한다. 현 상황이 그만큼 심각한 사안인 것이다.
폐허가 된 연평도 민가

ⓒ옹진군청
























누가 이 모습을 보고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모습은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대개 이런 곳들의 점유물이 아니었던가...


북한이 남한을 향해 포격을 시작한 이상 앞으로 그 이상의 도발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북한은 중동의 분쟁지역만큼 한반도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강수를 두고 있다.

누가 이렇게 한반도에 매파가 득세하도록 방조하였는가... 김정은 체제를 보좌할 당과 군의 간부들이 대미, 대남 교섭통이라고 안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명박 정부는 정말 북한 정세를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가... 과연 이 사태를 단순히 보수정권 흔들기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냐는 말이다...

과거 김영삼 정부 당시 영변 핵사태로 인한 극단적인 북미간 전쟁 위기에서도 남한의 보수 정부는 전쟁만큼은 피해보자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비록 김영삼-클린턴의 파트너가 모순적이었음에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명박-오바마의 파트너쉽은 과거 김영삼-클린턴의 그것만 못하다. 과연 미국은 북의 문제를 진정성 있게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이명박 정부에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목표는 있는가...

G20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북을 향한 유화 제스쳐를 광범위하게 흘렸다. 남북정상회담이라든지 이산가족 상봉이라든지 남한도 북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다 G20을 앞두고 국제적 치적이 망가질 것을 두려워한 대북 관리적 허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는 아직 남북정상회담의 의지도 없고 북한을 향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에 대해서도 더 나아진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김영삼 정부 시절의 것보다 진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황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겪으며 남한 정부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무로 돌리는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대북정책에서 보수주의 정책은 첨가해야 하는 것이지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현상유지는 대안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만큼 한다고 북한이 이명박 정부를 그만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지났고 더 나아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거듭된 실언과 자가당착적 대북정책에 대해 비정상국가 북한이 폭발했다. 애한테 사탕을 준다고 거듭 약속해도 거짓말이라고 탄로나면 결국 애도 어른을 때린다. 북한이 남한 정부에 출금을 요구하고 있다. 그 동안 자신들을 이용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도 남한 정부에 출금을 요구하고 있다. 그 동안 자신들을 이용해서 치적을 세운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삼면초가... 제발 이명박 정부가 지혜와 기개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덧붙여 북한의 이번 연평도 폭격은 결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북한은 이를 통해서 장단기적으로 전략적 우위에 설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남한 내의 매파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미 현 정부에 부담이 되었던 여러 이슈들이 이 사건 하나로 다 뭍혔다. 야당은 초당적 협력을 약속하고 나섰다. 국민의 생명 앞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국론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쉽게 이목을 끌었을지 모르지만 분명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을 감행하는 등 도무지 정상국가로 이행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거듭된 도발과 수십년 째 바뀌지 않는 외교수단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킬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나은 대안을 제시하기를 바라고 미국이 대화에 나서기를 요구한다면, 분명히 북한으로서도 폭격이 아닌 다른 수단을 사용했어야 한다. 남과 북의 이 이질감의 해소는 비단 남한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부디 꽃다운 나이에 숨진 두 장병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며 유가족에게 큰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북한은 심판 받을 것이다...
또한 공포에 질려 수십년을 살고 있는 연평도 주민에게 합당한 보상과 대책, 그리고 진정한 평화의 보상이 있기를 기도한다...

ⓒ 해양경찰청


국가인권위원회가 파탄났다. 파탄도 이런 파탄이 없다. 상임위원의 2/3가, 전문-자문-상담위원의 1/4이 옷을 벗었다. 내부 공무원들도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아예 조직의 수장을 비판하는 지경까지 왔다. 이상한 단체가 회의 중에 난입하지를 않나, 인권위의 파트너인 시민-인권단체들은 오히려 인권위에서 항위농성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 지경인데 인권위는 묵묵부답이다.

현병철 위원장 ⓒ한겨레



이미 언론과 시민단체들에서 밝혔다시피, 이 사태의 발단은 이념도 아니고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몰인권적 작태이다. 그럼에도 인권위원장의 인식은 현 상황이 일부 (이념적) 세력에 의한 인권위 흔들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몰인권적을 넘어 몰상식적이기까지 하다.

현 위원장의 버티기는 청와대의 지지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알다시피 청와대에서는 사임한 상임위원의 한 자리를 벌써 새로운 위원을 임명하여 채워넣었다. 그러나 신임 김영혜 위원조차 인권 문외한에 친 MB 인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정도면 어떤 메시지가 현 위원장에게 전달되었는지 안 봐도 훤하다.

문제는 MB 정권 하에서 이러한 뭉개기 전법이 수차례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관, 장관, 영진위원장(, 여기에 확대하면 신영철 대법관까지) 등등 문제 인사들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일부 세력의 비판으로 여기고 돌아설 줄을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거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슬그머니 태도를 바꾸어 정부를 향해 이념적 시각으로 편향된 비판을 하는 그 자들을 향해 되레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 이것이 촛불집회에 대한 MB식 반응이었다.

물론 모든 공직자들이 비판 앞에서 옷을 벗어야 된다면 공직의 중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그러나 항상 문제삼는 상황은 그 정도를 넘어선 것들이 많았다. 특히 이번 인권위 사태는 말할 것도 없다. 이건 끝장났다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양심이 있는 자라면 조직을 위해서라도 물러나줘야 하는 것이 상책이다. 무엇이 아쉬워서 대학 교수이신 훌륭하신 분이 자리에 연연하시는가. 오히려 MB 정부에 대한 없던 음모론도 생길 판이다.

인권위는 조직상 독립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특히 국가와 공공기관, 기업과 학교 등 개인이 상대하기 버거운 거대 조직을 상대로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본질적으로 대신 쓴 소리를 해주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서 인권위의 권고를 정부가 성실히 시행하는 비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어차피 안 지킬거면서 왜 MB는 그렇게 인권위를 장악하려고 하시는가. 차라리 인권위는 인권위대로 떠들고, MB는 MB대로 가시는 게 솔직한 것 아닌가.

MB 정부에서는 모든 일이 왜 이리 솔직하지 못한가. 차라리 인권위를 없애겠다고 말하면 확실히 논쟁이라도 생기지. 공을 인권위와 시민사회 간의 다툼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비겁한 짓이다.


검찰이 국회의원 11인의 후원회 사무실을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비판하는 견해들은 검찰의 태도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추궁하고 있다. 스폰서 검사나 대포폰 문제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청목회 사건에 대해서는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대다수의 여론은 정치권의 부패상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일 게다. 다음 아고라의 대체적인 의견들만 살펴보아도 국회의원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묻어나는 글들이 많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러한 수사가 검찰 독립에 일조하기를 바라는 점도 있는 것 같다. 이는 본 수사에서 여당 의원들도 동일하게 수사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늦은 시간이라 오늘은 결론만 짧게 서술하겠다.)
우리 나라의 정치관계법은 로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금품이 오가는 로비는 뇌물죄의 처벌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자금법은 다수의 소액 정치후원금은 열심히 장려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음성적인 정치자금으로 인해 부패가 만연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소위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2004년 정치관계법 개정에 있어서는 극도로 정치적 투명성을 강조하고, 정치자금을 통제하여 많은 국회의원들의 원성을 샀던 적이 있다.(그 배경에는 오세훈 본인이 국회의원 은퇴를 선언하면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심보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그래서 현재는 개정을 거쳐 조금 더 완화된 형태이나, 여전히 정치자금을 강하게 통제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국회의원의 후원금은 후원회를 통해 기부받게 되어 있고, 단체나 법인으로부터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개인에게 받게 되어 있는 것인데, 과연 여기에서 이러한 인적 연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회의원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내가 어떤 국회의원을 후원한다면, 그의 의정활동이 마음에 든다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활동을 지속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대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후원금이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법은 소규모의 후원금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압력을 허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단체나 법인의 자금이 개인 자금으로 둔갑하여 숨어들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청목회 사건은 자금의 출처가 문제될 지언정,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사용처를 알아보기 위해 압수수색을 하거나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인다.

물론 일부 의원은 불법적인 정치자금의 수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뇌물로 읽히고 있기도 하다. 뇌물이라면 말 그대로 국회의원의 직무에 관련된 사항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금전적 이득을 지급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정치자금법 상의 후원금에서는 뇌물이 적용될 수 없다고 봐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나아가, 만약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수수했다손 치더라도, 이를 정치자금법 위반이 아닌 뇌물죄로 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일이다. 뇌물죄는 징역을 최소한으로 하고 있으므로 뇌물죄에 해당하는 이상 국회의원의 직을 상실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치자금과 뇌물의 애매한 줄 위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행정부의 통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뇌물이 아니라,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을 위시한 행정부는 사정권력을 무기로 충분히 입법부를 옥죌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정치관련 범죄가 국회의원의 직위 상실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일본 법제는 우리보다 더 엄격하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국회의원에 대한 기소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에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검찰로 인해 국회의원 직 상실의 위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우리나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게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는 바로 이 점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를 단순히 부패한 정치권력을 일소하는 정의로운 사정으로 본다? 이것이야말로 난센스이다. 현재 여당이 반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밥그릇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매번 총선이 끝나면 각 당의 승패를 관심있게 살펴보지만, 덧붙여 어느 당에서 몇 명이나 옷을 벗을까도 살펴보게 된다.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전적으로 검찰의 몫이다. 국회의원을 뽑은 국민의 몫이 아니라는 소리다. 까놓고 말하면 대통령의 의중에 십수명의 목이 달려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황당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민주주의원칙이 권위를 상실한 것이 바로 이 나라이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청목회 사건을 두고 이리저리 말이 많은 것은 그 자체로 타당한 점이 있다. 이를 간과해서는 행정부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 향후 검찰 수사를 살펴보며 무엇이 뇌물인지를 정확하게 따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 글은 세광교회 청년2부 클럽에서 있던 논쟁에 대한 의견 제시로 쓴 것입니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두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 최바울 선교사님 :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1274598
2. 양희송 실장님 :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65


와우~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화끈한 논쟁이 붙었군요~
그냥 지나가려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서 저도 한 글자 남겨봅니다~
(철야 끝나고 자야 되는데 요 며칠 새 매일 과제로 밤을 샜더니만~;;)
상호간에 원색적 비난이 아니라 합리적인 토론이라면 얼마든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왜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과연 그것이 옳은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견해가 다른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글을 남기신 거의 모든 분이 이에 동의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과 구원의 길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논쟁은 그 “방법”이라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2. 또한 한 가지 더. 이것이 새생명축제에 관한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것은 당위라기보다 희망사항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마땅히 복음 전하기로 마음을 먹은 마당에 우리의 의지가 꺾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3. 여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최바울 선교사님이나 양희송 실장님의 글이나 우리 지체들의 나눔 모두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모두 땅 밟기라는 “방식”을 문제 삼습니다. 이를 다루기에 앞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4. 그것은 “복음”과 “전도”, “영접”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두현 형제의 마지막 글에 이를 해결해줄 좋은 단초가 보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알다시피, 아주 간단한 무미건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사 죄의 종이 된 우리를 그의 죽음으로 대신하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란 이러한 무미건조한 사실을 전하여 대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오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쳐야 함에도, 우리는 언제나 “영접”에 대한 갈망이 찜찜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4영리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든, 어떤 전도지든, 항상 말미에는 영접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항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무미건조한 사실에서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두현 형제의 말마따나 우리의 전도는 언제나 “개종”의 시도로 읽히게 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기독교의 행태에 대해 복음영접 대신 복음에 청함을 받았다라고 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영접은 하나님과 그에게 달린 문제이지 우리의 손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이러한 우리의 오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복음을 받지 못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를 쓰고 그가 복음을 영접하기를 원하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듣지 않은 자는 여전히 불쌍한 상황에 있게 됩니다.(이것은 예전에 제가 모 선교단체 간사님과 캠퍼스에서 논쟁하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영혼에 대한 애처로움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도 그의 동족의 믿지 않음을 슬피 여겼거늘!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애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을 위하여 누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이방인!!! 바울은 유대인을 내치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의롭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9-11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도 복음을 이미 다 들었고, 그들을 내치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무미건조한 그 복음에, 하나님의 선택에 “영접”을 맡겼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억지로 사람들에게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6. 그러므로 전도와 관련한 우리의 모든 인간적 노력을 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복음 앞에 방관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하여 유대인을 시기케 해서 몇 명을 구원하려했던 그 전략이 우리의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복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복음을 여전히 율법에 매이게 하는 잘못을 매섭게 눈치 챘던, 그 바울의 광활한 복음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을 시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이제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렇다면 그 방식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양희송 실장님은 기독교에 뿌리박힌 “공격적 선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호성 형제님께서 적절한 반문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원래 공격적입니다. 한 인간이 그의 전 인격적 세계관을 대전환하는데, 어떻게 공격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문제는 그 공격이 하나님이 주체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격은 그냥 “공격”입니다. 하나님의 공격이 “선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공격하면 “선교”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공격이 “영적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육적 공격입니다.

8. 최바울 선교사님은 육적 공격, 소위 "공격적 선교"가 구약에 근거하고 있기에 올바르다고 말씀하십니다.그렇다면 구약 말씀은 왜 육적 공격을 찬양하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적 세계관의 전모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현실주의, 우리가 한 번은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성 형제님의 말씀대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율법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바로 육적 공격입니다. 너무나도 의롭고 선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끝이 불행한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실패한 길이라고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 7장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이 율법적 현실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님이 계신 신약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이 길을 한 번은 거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죄인임을 깨닫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끝까지 그러한 육적 공격을 추구한다면, 오직 모든 일에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어야 의롭다고 인정됩니다. 율법의 전부를 지키더라도 단 하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전부 지키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을 땅 밟고 싶으시다면 좋습니다. 대신 제발 청와대도 밟으시고, 삼성도 밟으시고, 미군기지도 밟으시고, 기륭전자 구 사옥도 좀 밟으시고 하십시오. 왜 우상은 절에만 있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조차도 다 밟지 못하였기에, 성령을 보내사 친히 그 땅을 밟으십니다.

10. 새벽이라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글이 막 써져서 실수도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에게 복음에 있어서 정말 율법적인 실천이 아니라 믿음의 실천, 복음적 실천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감할 수 없는 단조로운 사실이지만, 우리는 증인이기에 우리의 실천에 따라 그 복음이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복음적 실천이 제발 쪼잔하고 속 좁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11.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의견을 남기는 것은 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저를 포함하여~^^V). 최소한 그러한 믿음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신공격성 비난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봉은사에 간 찬양인도자 학교 지체들에게도 응원을 하고 싶었습니다. 무릎만 안 꿇었더라면, 홈페이지도 닫고 하지 않았더라면, 청와대 등등에도 갔었더라면... 그 뿐입니다.

- 기륭전자분회 해고노조원 복직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연합기도회에 함께하고.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59>


소위 “기륭전자사태”라는 것이 1800여일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오늘이 천팔백하고도 몇 십 몇 일이라고 세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이미 우리가 이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관성이 생겨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 문제는 기륭전자의 주가에 신경 쓰는 이들의 수첩위에서나 관리되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최근 다시 뉴스에서 기륭전자사태의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5년을 넘게 끌었던 해고 노동자들과 사측의 대립이, 극적으로 타협될 뻔 하다가 황당하게 결렬된 이후 다시 극한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굴삭기를 앞세워 한 조각남은 건물과 노동자들의 희망을 함께 무너뜨리려하고, 노동자들은 생명을 담보로 회사에 협박 아닌 협박을 시작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앞 다투어 정부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호소하고 있지만, 어떠한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기륭을 제2의 평택으로 만들 것인가”, “기륭을 제2의 용산으로 만들 것인가”와 같은 두려운 수사만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택과 용산을 기억하는 범인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일 뿐이다.

ⓒ기륭전자분회



이러한 사태에 이르러 10월 22일 오후 4시, 기독교인들도 애타는 마음을 모아 그 자리에 섰다. 새벽이슬 지체들 몇몇도 그 앞에 섰다.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최한 연합기도회의 부제는 “우리는 결국 이 벽을 넘는다”였다. 실상은 허물어져 버린 벽, 더한 실상은 그 너머가 허허벌판이라는 공허한 벽, 그리고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사측의 “보이지 않는 벽”이 바로 넘어야 할 그것이었다.

ⓒ기륭전자분회


굴삭기 위에서 위태롭게 전선을 부여잡고 현장의 소리를 전하는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1800여일의 싸움을 끌어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리만큼 확신이 있었다. 동지들이 생계의 어려움으로 투쟁 현장을 잠시 떠나 근처 공장에서 여전히 파견직을 전전한다는 근황을 전할 때는 그에게서 분함이 느껴졌다. 굴삭기 위에서 위태롭게 앉아있는 그에게서!

ⓒ기륭전자분회

 

말씀의 증언을 담당한 김영철 목사(새민족교회)는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을 가지고 “건너갈 수 없는 곳”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이 벽을 넘는 것을 꿈꾸고 있지만, 도리어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부자는 나사로의 이곳으로 건너올 수 없다고 전하였던 것! 게다가 그 심연이 어찌나 깊은지 죽은 자의 부활로도 되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라는 것!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명령도 지키지 않고서 그 심연을 건너려고 할 수 없다는 것! 노동자와 회사의 위치가 말씀 위에 교묘히 역전되는 이 상황에 어찌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활하신 주님은 막힌 담을 허무시지만, 도리어 높은 벽을 쌓기도 하는 분이셨다.

짧은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1800여일 중 하루의 면식만이 있는 나에게도 감사하다고 해맑게 인사를 던져주시는 김소연 분회장의 목소리는 그의 위태로운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를 두고 땅을 대신 밟는 나의 대답이 더 위태로웠던지도 모르겠다.

기륭전자사태는 우리와 동떨어진 채로 1800여일을 지속되었지만, 분명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초국적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우선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은 그 자체로 정규직이 아닌 소위 아웃소싱이라는 제도아래 비정규직을 창설하여 자본주의적 분업화를 합법화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 파견법 제5조 제1항과 동시행령 [별표1]에 따르면 파견업무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를 제외”한 전문적인 업무에 한정하도록 명시하였다. 그럼에도 기륭전자사태에서처럼 기업들은 파견대상업무가 아닌 곳에도 불법파견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로 동조하고, 법원은 불법파견은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는 파견법 적용 대상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뻔한 스토리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있는 것이다(근래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달리 보고 있음에도 하급심 법원은 아직도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근본적으로 파견법은, IMF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인건비를 삭감시키기 위해 기업 내 일부 부서를 전부 해고하고 파견고용이라는 형태로 이름만 바꾸어 재고용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은 해고를 무기로 노동자들이 파견고용을 받아들이도록 했고,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던 기업의 고위 임직원들은 버젓이 파견업체의 사장이 되어 고소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위험의 외주화, 위험의 노동자에 대한 전가 제도가 전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을 내세워 파견업무를 확대하였고, 현 정부 들어서 경영계는 노골적으로 파견업무 대상을 무제한으로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파견고용에 있어서 유일한 방어막으로 파견법 제21조에서 파견근로자들의 차별대우를 금지하도록 규정하였으나, 기업은 동종 또는 유사 업무를 파견고용을 통해 애초에 제거하였으므로 저임금의 유익을 합법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륭전자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는커녕, 직장을 폐쇄하고, 본사 이전 및 공장을 철거하고 부지를 매각하며, 생산라인을 전면적으로 중국으로 이전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노동자의 최후의 투쟁 수단이라는 점거가 차단된 상황에서, 허허벌판을 앞두고 겨우 경비실 하나를 점거하여 굴삭기를 마주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현실을 말하는 이유는 법이란 사실 확정의 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법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꿈꾼다 해도 이 땅의 “사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어떠한 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지 절대 분간할 수 없다. 세상의 법이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발휘한다고 해도 악인의 지혜를 넘어설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2007년 비정규직 대란을 보며 그 상황을 한 차례 경험하였고, 이는 황당한 논리로 2년마다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악인의 지혜를 넘어서게 해야 한다.

필자도 지혜가 일천하여 이에 대한 말씀의 해결책과 현실의 당부를 판단하기에는 부족함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당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는 어떠한 공의로운 판단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일한 현실주의”, 이것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야 할 벽이다. 우리는 “지극한 현실주의”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소설 『쿠오바디스』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불과 피로 번진 로마를 뒤로 하고 피신할 때,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돌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는 주님께 “쿠오바디스 도미네?”(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를 풍자하여 갈팡질팡하는 무엇을 비판하는데 이 말을 애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주님은 분명히 네가 버린 “로마”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단호히 길을 돌이키며 사환의 “쿠오바디스 도미네?”라는 질문에 대하여 담대히 “로마”라고 외쳤다. 한국 교회여, 어디로 갈 것인가? 기륭전자의 저 벽으로!

ⓒ태윤


ⓒ태윤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59>

2007년 여름 비정규직 관련법이 새로이 개정된 지 이제 3년이 지났습니다.
개정 첫 해의 혼란상과 기업들의 이기주의에 개탄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벽이슬 가까이에 있어 함께 했었던 홈에버 비정규직 해고 투쟁을 시작으로 봇물터지듯 여러 기업들에서 경영상 곤란을 이유로 가족과 같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다시 그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피해는 대부분 고스란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기륭전자사태는 이러한 아비규환의 시발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사측의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해고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1800여일의 지난한 투쟁이 되었습니다.
투쟁의 중심에 있던 노동자들은 2005년 당시 외부업체로부터 파견된 직원이었는데, 실제로는 일반 정직원과 같은 근로를 하고 기륭전자로부터 업무지시를 받는 등 실질적으로는 기륭전자 직원임에도 차별대우를 받게되자 노조를 결성하고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회사는 해고라는 수단으로 차갑게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노동부에서도 이를 불법파견으로 규정하고 시정조치를 요구했음에도 회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외국으로의 공장 이전이라는 황당한 방식으로 회피하는 등 스스로 사태를 장기화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부가 적극 나서서 이를 해결했어야 함에도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친 기업 성향의 노동부가 이 모든 상황이 사인간 해결이 필요한 일이라고 치부하고는 직무유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정치권과 각 시민단체 등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회사도 정부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극한 투쟁을 견디지 못한 조합원 한 분이 지병으로 사망하시게 되었습니다.

 극한 결과를 맞고서야 재개된 협상은 오랜 시간을 끌어 다행히 최근 노조원 일부를 직접 고용하는 협상안이 타결되고 최종 확정만 남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측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하고 갑자기 구 사옥 부지의 개발을 강행하겠다며 다시 포크레인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륭전자분회

 이와 같은 현 상황에 대해 정치권과 노동계 모두 사태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격화된 양측의 대립이 또 어떤 희생을 낫게 될 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내일 오후 4시에 기륭전자 구 사옥에서 사태해결을 위한 기도회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륭전자분회

아래는 기도회 관련 메일을 첨부합니다.

 

***

 

 

추석 전부터 기륭전자 농성중인 노조원에 대한 직접고용 실무협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11일 오전에 마지막 조인식을 앞두고 있던 차, 밤늦게 회사측의 일방적인 협상 결렬 통보가 날라왔습니다.

이에 기륭전자분회 노조는 다시금 세 번째 단식에 돌입하였습니다.

험난하게 시작된 세번째 단식 3일째 농성장에 건설회사측의 포크레인이 들이닥쳐 농성장을 철거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포크레인 앞에 한 명은 위로 올라가서 목숨을 걸고 첫 시도를 막아냈습니다.

16일에는 경찰4개 중대를 동원, 점거중인 포크레인을 회수하려는 시도가 있어 분회장님이 전선줄에 매달려 저지하는 극적인 순간도 있었습니다.

6년여를 끌어오다 마지막 해결 직전에 결렬된 기륭전자 협상, 이 투쟁국면 중에서 회사 측에 대한 교섭재개 요구가 강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입니다.

비록 급박한 일정이오나, 상황이 긴박하여 촉박하게 날짜가 정해졌사오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합동기도회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로 함께 하셔서, 기륭분회원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일시: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오후 4시

장소: 기륭전자 구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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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길 (파일 첨부된 약도를 참고 바랍니다.)

대중교통: 버스 녹색 5714 버스 타고 마리오 앞 하차

지하철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하차 3번 마을버스 충남슈퍼 하차

자동차: 네비게이션으로 오실 경우 금천구 가산동 세일로 빌딩으로 설정바랍니다.(인접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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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사회의 대안적 발걸음 영등포산업선교회 (현장 연락처: 이태훈 목사 010-6288-1998/ 이훈희 010-8957-2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