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륭전자분회 해고노조원 복직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연합기도회에 함께하고.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59>


소위 “기륭전자사태”라는 것이 1800여일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오늘이 천팔백하고도 몇 십 몇 일이라고 세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이미 우리가 이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관성이 생겨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 문제는 기륭전자의 주가에 신경 쓰는 이들의 수첩위에서나 관리되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최근 다시 뉴스에서 기륭전자사태의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5년을 넘게 끌었던 해고 노동자들과 사측의 대립이, 극적으로 타협될 뻔 하다가 황당하게 결렬된 이후 다시 극한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굴삭기를 앞세워 한 조각남은 건물과 노동자들의 희망을 함께 무너뜨리려하고, 노동자들은 생명을 담보로 회사에 협박 아닌 협박을 시작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앞 다투어 정부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호소하고 있지만, 어떠한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기륭을 제2의 평택으로 만들 것인가”, “기륭을 제2의 용산으로 만들 것인가”와 같은 두려운 수사만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택과 용산을 기억하는 범인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일 뿐이다.

ⓒ기륭전자분회



이러한 사태에 이르러 10월 22일 오후 4시, 기독교인들도 애타는 마음을 모아 그 자리에 섰다. 새벽이슬 지체들 몇몇도 그 앞에 섰다.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최한 연합기도회의 부제는 “우리는 결국 이 벽을 넘는다”였다. 실상은 허물어져 버린 벽, 더한 실상은 그 너머가 허허벌판이라는 공허한 벽, 그리고 노동자를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사측의 “보이지 않는 벽”이 바로 넘어야 할 그것이었다.

ⓒ기륭전자분회


굴삭기 위에서 위태롭게 전선을 부여잡고 현장의 소리를 전하는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1800여일의 싸움을 끌어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리만큼 확신이 있었다. 동지들이 생계의 어려움으로 투쟁 현장을 잠시 떠나 근처 공장에서 여전히 파견직을 전전한다는 근황을 전할 때는 그에게서 분함이 느껴졌다. 굴삭기 위에서 위태롭게 앉아있는 그에게서!

ⓒ기륭전자분회

 

말씀의 증언을 담당한 김영철 목사(새민족교회)는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을 가지고 “건너갈 수 없는 곳”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이 벽을 넘는 것을 꿈꾸고 있지만, 도리어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부자는 나사로의 이곳으로 건너올 수 없다고 전하였던 것! 게다가 그 심연이 어찌나 깊은지 죽은 자의 부활로도 되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라는 것!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명령도 지키지 않고서 그 심연을 건너려고 할 수 없다는 것! 노동자와 회사의 위치가 말씀 위에 교묘히 역전되는 이 상황에 어찌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활하신 주님은 막힌 담을 허무시지만, 도리어 높은 벽을 쌓기도 하는 분이셨다.

짧은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1800여일 중 하루의 면식만이 있는 나에게도 감사하다고 해맑게 인사를 던져주시는 김소연 분회장의 목소리는 그의 위태로운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를 두고 땅을 대신 밟는 나의 대답이 더 위태로웠던지도 모르겠다.

기륭전자사태는 우리와 동떨어진 채로 1800여일을 지속되었지만, 분명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초국적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우선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은 그 자체로 정규직이 아닌 소위 아웃소싱이라는 제도아래 비정규직을 창설하여 자본주의적 분업화를 합법화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 파견법 제5조 제1항과 동시행령 [별표1]에 따르면 파견업무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를 제외”한 전문적인 업무에 한정하도록 명시하였다. 그럼에도 기륭전자사태에서처럼 기업들은 파견대상업무가 아닌 곳에도 불법파견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로 동조하고, 법원은 불법파견은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는 파견법 적용 대상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뻔한 스토리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있는 것이다(근래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달리 보고 있음에도 하급심 법원은 아직도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근본적으로 파견법은, IMF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인건비를 삭감시키기 위해 기업 내 일부 부서를 전부 해고하고 파견고용이라는 형태로 이름만 바꾸어 재고용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은 해고를 무기로 노동자들이 파견고용을 받아들이도록 했고,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던 기업의 고위 임직원들은 버젓이 파견업체의 사장이 되어 고소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위험의 외주화, 위험의 노동자에 대한 전가 제도가 전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을 내세워 파견업무를 확대하였고, 현 정부 들어서 경영계는 노골적으로 파견업무 대상을 무제한으로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파견고용에 있어서 유일한 방어막으로 파견법 제21조에서 파견근로자들의 차별대우를 금지하도록 규정하였으나, 기업은 동종 또는 유사 업무를 파견고용을 통해 애초에 제거하였으므로 저임금의 유익을 합법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륭전자는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는커녕, 직장을 폐쇄하고, 본사 이전 및 공장을 철거하고 부지를 매각하며, 생산라인을 전면적으로 중국으로 이전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노동자의 최후의 투쟁 수단이라는 점거가 차단된 상황에서, 허허벌판을 앞두고 겨우 경비실 하나를 점거하여 굴삭기를 마주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현실을 말하는 이유는 법이란 사실 확정의 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법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꿈꾼다 해도 이 땅의 “사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어떠한 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지 절대 분간할 수 없다. 세상의 법이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발휘한다고 해도 악인의 지혜를 넘어설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2007년 비정규직 대란을 보며 그 상황을 한 차례 경험하였고, 이는 황당한 논리로 2년마다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악인의 지혜를 넘어서게 해야 한다.

필자도 지혜가 일천하여 이에 대한 말씀의 해결책과 현실의 당부를 판단하기에는 부족함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당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는 어떠한 공의로운 판단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일한 현실주의”, 이것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야 할 벽이다. 우리는 “지극한 현실주의”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소설 『쿠오바디스』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불과 피로 번진 로마를 뒤로 하고 피신할 때,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돌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는 주님께 “쿠오바디스 도미네?”(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를 풍자하여 갈팡질팡하는 무엇을 비판하는데 이 말을 애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주님은 분명히 네가 버린 “로마”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단호히 길을 돌이키며 사환의 “쿠오바디스 도미네?”라는 질문에 대하여 담대히 “로마”라고 외쳤다. 한국 교회여, 어디로 갈 것인가? 기륭전자의 저 벽으로!

ⓒ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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