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나봇의 포도원,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12월 1일, 아직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 이 날,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체온과 날숨이 뒤섞여 뜨겁게 느껴진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이런 자리를 미리 마련하지 않았던지. 바로 홍대의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열린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에서였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의 사람들의 열기, 몇 개의 전구가 만들어낸 어두운 빛, 이런 것들이 합쳐져 작은 흥분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모인 초대교인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올해 4월 초까지는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예배가 두리반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채림 ·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두리반보다 더 외로운 곳으로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예배가 뜸하던 즈음에 성공회교 한용걸 신부님께서 외로이 매주 목요일마다 촛불 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전등도 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빛나는 몇 개의 촛불을 사이로 민중가요와 성가곡을 넘나드는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 예배만 드리면 눈물이 나더라고 쓸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두리반에 이번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래봤자 8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뿐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채림 집사님께서는 홍대 인디밴드들의 연합 공연 이후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감탄하셨습니다. 의자를 50여개를 깔아놓고도 뒤에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문 밖에서 예배드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번 자리는 통일시대평화누리, 새벽이슬, IVF사회부가 연합해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50여명을 예상하고 준비한 자리에 차고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두리반에 대한 애타는 죄송함이 많았던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예배는 유채림 집사님께서 기억을 복기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12월 24일 도시공항철도 역사 공사 지역에 편입된 두리반은 강제 철거를 당했습니다. 평생 모은 돈으로 겨우 연 가게를 포기할 수 없다는 안종녀 집사님의 눈물과 분노가 겁쟁이 남편을 움직인 동력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끝나가는 밤에 공사 가림판을 뜯고 들어가 “내 가게”를 되찾았습니다. 그들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대상도 아니어서 영업손실보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달랑 이사비 300만원을 받고 나가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들은 이 억울함 때문에 지난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다다라가는 지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채림 집사님은 작가이셔서 그런지 그들의 지난 투쟁의 이야기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 싸움입니다. 즉, 형이상학적 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두리반은 이기주의나 억울함의 감정을 넘어선 공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두리반은 오늘날 철거민들에 대한 이 사회의 잔인한 공격을 대표하는 곳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얼굴을 한 제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전이 불법적으로 단전을 하여서 무더위 속에 상한 음식으로 여름을 나야 했을 때도, 이제 추운 겨울이 다가와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때에도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에 대한 화답으로 구교형 목사님(성서한국 사무총장)께서 다니엘서 4장 19-27절 말씀으로 “내가 선 자리를 바로 인식하라!”는 선포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관점에서 느부갓네살의 자리가 어디인지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26절), 그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27절)입니다. 설교의 말미에 이 정권에 불의가 가득한 것은 우리가 공범인 때문이며, 인간의 법이 무너진 곳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의지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달구질을 하셨습니다.

ⓒ 정다정

 

이 시대의 불의가 중단되도록, 그리고 두리반에 위로가 있도록 기도할 때에, 고조되는 기도의 목소리들과 함께 참석자들이 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두 집사님을 축복하며 기도할 때, 행여나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기라도 할까봐 높이 손을 뻗어 하나님의 축복의 방향을 고정했습니다.

철거민의 눈물이 시작된 개발주의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용산과 두리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개발 입법이 얼마나 철거민들의 보호에 대해서는 무용한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헌법은 제23조 제3항에서 공익사업에 있어서 재산권의 수용 등이 있을 때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이를 완전한 보상이라고 해석합니다. 완전한 보상이라면 당연히 철거되는 한 점포로 하여금 인근에 다시 점포를 열어 사업구역과 단골 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77조에서는 단지 영업이익과 이전비용을 “참작”하라고 권유할 뿐입니다. 그래서 용산의 세입자들은 망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두리반은 공익사업이 아닌 민간사업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권리마저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인간의 관계이니 서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 작금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철거 용역이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철거를 강행해도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두리반의 싸움이 이기주의일 수 있을까요? 성경이 나봇의 개인적 사건을 들어 시대적 보편성을 갖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두리반도 우리에게 그러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사5:8) 개발주의야말로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이기주의입니다. 불의한 자본과 탐욕은 두 집사님의 거처를 좁은 건물로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의 활동과 소문들은 전국을 향해 퍼져 날리고 있습니다. 마치 사단이 예수를 좁디좁은 나무 위에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 보혈이 온 만물의 구원을 위해 흩뿌려졌던 것처럼, 두리반은 세상의 자유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두리반을 찾아 해방의 기쁨을 누리려는 많은 홍대의 인디밴드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은혜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과 정의로 불의와 탐욕에 맞서시기로, 형이상학적 전투를 벌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 다과로 시루떡을 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기쁜 날도 멀었는데 떡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잔치와 같았습니다. 함께 떡을 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두리반에서 만든 떡을 떼는 기쁨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작년에 학교 캠퍼스를 거닐다가 하루에 전도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는 분의 모습이나 전단지를 보니까 같은 단체이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입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해도 붙잡기도 하고, 어떻게 전도하나싶어 궁금하기도 하여 "전도를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던 분들은 청년목회로 유명한 모 교회 지체들이었습니다. 당시가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 기간이라 아마도 장래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자를 만났을 때 분명히 기독교인이고 교회를 잘 다니고 있다고 말했음에도 그 지체는 제게 "전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라는 것이 순전히 교회 자랑이었는데, 무엇무엇이 너무 재미있다느니, 청년이 많아서 너무 재미있을 거라느니, 재미를 빼면 사실 들은 "도"가 없었습니다.

 순간 기분이 좀 나빠서 저는 교회 잘 다닐테니까, "전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멀리서 그 분이 다른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열에 아홉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 자랑이요, 교인 빼가기 였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담임목사님 자랑도 하셨는데, 목사님께 어떤 복음을 받았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대적으로 칭찬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리스 지방의 본(model) 교회라고까지 칭하고 있습니다(7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 "재미있게" 지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일으키고, 사랑으로써 수고하고 헌신하기를 아끼지 않으며, 소망으로써 어떠한 고난도 감내하고 살아내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런데 그들이 확실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러한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말로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이되었고,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종과 같은 모양으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5절).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닮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있습니다(6절). 그래서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온전하여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애쓰고 수고하고 인내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러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한 명의 사람도 그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4절).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새벽이슬은 선교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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