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무지하다면 무지할 수도 있고, 객관적이라면 객관적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계속 기사가 나오길래 모자라더라도 우선 한 마디를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쓴다.

1. 허재현 한겨레 기자와 진중권 씨가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당 영화를 놓고 트위터 상의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여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과연 이 영화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둘 다 아니다.

이 부분을 허재현 기자도 진중권 씨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분명히 그렇게 표현했다. 두 사람 간의 관점은 무엇을 본질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일 뿐 이게 100% 허구다, 진실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그럼에도 누리꾼들이 지나치게 논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간 진중권 씨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건대, 그의 취지는 영화라는 다분히 정보전달만이 아닌 감정전달이 주요한 매개체를 사용하여 마치 사실의 재구성이라는 홍보로 당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재판이 긑난 이상 저널리스트나 학자의 영역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를 영화화하여 대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그가 자주 감정과잉으로 정치선전을 반복한다고 비난하는 나꼼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 몫하고 있겠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의견을 쓰고 싶다.)
반대로 허재현 기자는 당 영화의 법정에서의 변론장면들은 최소한 재판기록에 기반한 것으로 단순히 감정적으로 "사법부 나쁜 놈"을 말하고 싶어서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는 일부 픽션이 가미된 사회고발적 영화로서 '문제의식'을 알아달라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 있다 생각한다. 물론 서로 서 있는 지점은 다를 지 모르지만 어쨌든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진중권식으로 하면 영화보고 와서 "사법부 졸라 나빠, 다 없애버려" 이러지 말라는 것이고, 허재현 식으로 하면 "영화니까 이렇게 한 거지 뭘" 이라고 끝나지 말라는 것일테다. 제발 감정은 갖되 이성은 지키자. 제발 이성은 갖되 똑똑한 척 하지 말자.


2. 그런데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 박훈 변호사, 박홍우 부장판사, 당 재판의 재판부는 이 사건이 영화화됨으로써 무엇을 얻고, 잃게 될까. 

당 영화는 영화 <도가니>와 가장 많이 비교되고 있다. 그만큼의 사회적 파장과 공분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도가니열풍처럼 당 영화의 당 재판도 재심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당사자들로서는 매우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박훈 변호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 싸움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김명호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박홍우 부장판사는 어떤 식이었든 사실상 범죄의 피해자이다. 그가 판사라고 해서 그 사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가 판사였기에 제 식구 감싸기에 의해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피해자에 대한 감정적 만족에도 그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정말로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본질은 범인에 대한 책임에 맞는 처벌이다. 이점에서 박홍우 판사가 어떤 이득을 본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끝나버린 재판, 특별히 재심이 필요할 정도로 범죄적 정황이나 오류가 엿보이는 재판이 아니었던 이상, 이들에 대한 관심은 다큐 이상의 관심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의 한 축을 이루는 사법부는 다르다. 사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재심을 하라는 청구가 아니라, 앞으로의 재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사법부에게 사실확정과 법적 판단의 전속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권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권세를 의미하거나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권위는 사회의 합의로 주어진 것이기에 권위에 합당하지 않다면 권위를 빼앗기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면 사법부가 놓여진 문제상황은 이것이다. 사법부에서 서둘러 해명자료를 돌리는 것이 비록 대중의 감정적 선동경향 때문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해명도 변명 이상이 아니게 된다.
고집불통의 원칙주의자에게 그다지 모질게 재판할 이유가 있었던가. 그런 정도의 사법부라면 조폭에게는, 장애인에게는, 무학자에게는, 하층민에게는, 여성에게는 등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김명호 교수가 떼쟁이이기에 재판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송지휘권이란 권세와 권위주의의 산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판사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울고 짜고, 싸우고 다투는 이들이다. 못 배우고 답답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판사에게 권위를 준 것이다. 판사가 입정할 때 방청석까지 기립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귀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법적 효율만이라면 우리는 이런 재판을 뒤집어 엎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법부에게 지혜가 있기를 소망해본다.



3. 당 영화를 보러 가시는 분들은 꼭 이런 점을 염두하셔서 단순한 분노에 그치지 마시길. 행동하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