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99%, Occupy San Francisco (1 of 19)
The 99%, Occupy San Francisco (1 of 19) by glennshootspeople 저작자 표시비영리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주의의 등장

식민지 점령과 해외무역을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킴. 17c 영국의 발전은 근대적 산업자본주의와 그 부산물인 자유주의를 낳았음. 기계제 공장제가 확산되어 대규모 조직적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 부르주아지는 지배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정치경제학과 자유주의를 활용.

공업의 확산으로 도시기반으로 전환, 농촌은 해체. 인클로저로 공장으로 노동인구가 대규모로 유입,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을 강요받았음.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의 기원.

근대 사회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됨. 중세와 달리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 평등을 달성함으로서 정치적 평등을 달성.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불평등.


정치적 노선의 사회주의: 바뵈프와 블랑키

① 가난한 자들의 봉기

정치혁명을 통한 사회변혁, 즉 무장봉기를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이 필요 - 프랑스 혁명의 기억. but 소수의 지식인들의 음모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 민중이 아니라. 사회는 부자와 빈자의 계급대립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빈곤이 빈자들을 혁명의 지지세력으로 만드는 필수 조건임.

블랑키는 소수의 혁명가와 빈자들이 혁명적인 독재를 하는 과도기를 거쳐야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②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오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인해 맑스주의는 독재를 옹호한다고 오해받음. but 독재의 dictatorship은 고대 로마에서 위기상황에 임명되는 독재관을 뜻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지배(rule)의 의미로 사용되었음.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세력인 정치체제를 의미함. 독재가 아님. but 러시아혁명 이후 반공주의자들이 러시아혁명을 비판하기 위해 이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처럼 전제정치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 그리하여 냉전기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반의어라는 개념쌍이 확산된 것임. 전체주의라는 용어도 자본가들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한 통속으로 묶어 자신들과 대비하기 위해 창조해낸 것. 사실은 공산주의-자본주의, 민주주의-파시즘이 개념쌍임에도.


경제적 노선의 사회주의: 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바쿠닌

① 생산력발전에 대한 낙관과 비관

생시몽 : 미래는 고도산업사회가 될 것이며 산업가가 중심이 될 것. 따라서 사회를 산업을 위해 조직해야 함. 정치는 경제영역으로 환원되어야 하며, 정치의 특징인 지배는 사라지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리'만이 남을 것. 따라서 국가는 소멸됨.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획경제가 필요함.

푸리에 : 산업화의 효과는 양가적. 빈곤은 풍요로부터 비롯됨. 이상적 공동체로서 '팔랑스테르'를 상정.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념을 조절하여 노동을 쾌락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함.

맑스도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이 자신의 자아실현과 타인의 자아실현의 조건이 된다고 함. 이것이 자유주의와의 차이.

② 정치적 행동과 직접행동

프루동 : 정치를 부정(아나키즘). 정치권력 획득을 통한 사회변혁을 부정. 국가는 소생산자들이 연합된 협동조합으로 대체되어야 함. 노동전수익권설의 입장에서 화폐에 의한 상품교환자체가 착취를 일으킨다고 봄. 노동자가 소생산자가 되기 위해 상호은행이 대출을 해주고 상품은 노동화폐로 거래되어야 함.

바쿠닌 : 아나키즘을 폭력혁명으로 실현시키려고 함. 인민들이 혁명적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과도기가 불필요. 의회전술을 부정.


<아...>

1. 부르주아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평등의 현실화(정치적 계급의 폐지 경향)와 경제적 불평등의 괴리. 현실적으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두 영역이 도리어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줌. 부르주아혁명-자본주의 발전-사회주의의 대두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관계를 보여준 기간.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면서 좀더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관계요소. 최근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정치민주화와 별개의 논의라고 할 수 없는 지점.

2. 혁명론. 사회변혁은 혁명으로, 아니면 개혁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고전적 논의. 중요한 것은 사회는 대립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결국 지지세력을 누가 얼마나, 어느 정도의 강도로 결집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 다만 사회적 소외집단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가능할까. 

3. 아나키즘에서부터 국가의 소멸론까지 일련의 정치영역의 축소이론의 타당성. 경제의 고도화(산업화)는 도리어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줬음. 국가를 폐지하기 위한 운동 또한 정치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한계. 결국 정치와 경제는 서로 밀접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

4. 사회주의는 공산사회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산업의 고도화, 생산력의 증대를 들고 있음.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총체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를 위해 고안된 것이 계획경제와 쾌락으로서의 노동개념. 현대산업사회에서는 상당히 실현불가능한 개념이라고 볼 수밖에 없음.

5. 이 점에서 프루동의 아나키즘은 훨씬 현실적. 산업의 고도화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의 혁명이 가능. 이것이 바쿠닌주의가 맑스주의와 대립했던 이유가 아닐지.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과도기가 불요하다는 것. 이점에서 맑스주의는 개량주의로 변절될 우려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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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개념들 정리

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개인주의·자유주의의 반대, 기본 단위를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상정, 사유재산권보다 사회적 소유 강조.

공산주의: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체스코의 영향(가난사상, 곧 성직자의 토지무소유)을 받은 수도원운동 중 급진적인 소수가 자신들을 코뮤니스트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 프랑스혁명에서 자유(소유권)를 강조한 지롱드파와 평등(생존권)을 강조한 자코뱅파의 대립 중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파가 해산된 후 프랑스아 바뵈프를 위시한 자코뱅 좌파(평등파)가 자신들을 공산주의라고 지칭. 이는 루이 블랑키와 맑스에 의해 계승.

양자의 차이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보다 스펙트럼이 넓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중간계급의 운동으로, 공산주의를 노동자계급의 운동으로 정의하거나(『공산당선언』),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구분하여(『고타강령 초안 비판』), 소련에서는 전자를 사회주의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② 맑스주의

애초 반대파(아나키스트)들이 맑스주의자를 비하하는 용어였으나,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스스로를 지칭하는 긍정적인 용어로 수용된 후, 칼 카우츠키에 의해 수정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

맑스-레닌주의: 스탈린이 맑스와 레닌을 계승한 자신의 사상의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용어. 그 부정적 의미 때문에 오늘날 Communism을 코뮨주의라고 번역하는 경향이 있음.

③ 용어상의 혼란

진보 근대 서구 계몽주의자들의 용어. 생산력 증대와 정치와 문화의 발전을 모두 의미.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진보에 해당.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진보·좌파라 불리면서 혼란이 발생.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이후 자유주의자들이 진보를 자처하면서 더 복잡해짐. 결과적으로 진보·보수, 우파·좌파는 과학적 개념이나 학문적 용어라고 할 수 없음.


<아...>

1. 개인주의·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회주의가 사회를 분석하는 기본 단위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것이 본질적으로 재산권의 귀속문제와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 즉, 절대주의 시기에 정치적 부자유(무권리)-경제적 자유(권리)의 진보가 있었지만, 정치적 자유(권리)가 없는 경제적 자유(권리)는 명목적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 프랑스혁명. 프랑스혁명이 유산계급에게 형식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자유가 확보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부르주아적 혁명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양 권리를 어떻게 실질화할 것이냐가 사회주의의 문제의식.

2. 맑스주의 또한 진보라는 점에서 근대의 기획에 해당. 따라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동일하게 유효. 다만 주체의 변화라는 점에서 근대와 탈근대의 가교라 할 수 있다. 

3. 자유주의의 전복성에 대한 저자의 의문. 자유주의는 전복적일 수 없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 프랑스 혁명이 예 아닌가. 다만 프랑스 혁명의 결과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오늘날 전복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면? 이 또한 급진적, 전복적이라는 용어의 비과학성을 지적해야할 듯. 저자는 90년대 이후에도 도저하게 이어지는 권위주의를 경시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활동의 결과가 반동이라는 아이러니는 충분히 공감.


“돈”의 문제는 사회의 경제체제를 고려해야 하며,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생활이 돈과 연관되어 있다. 돈은 총체적인 경제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돈이 추상화·객관화되어 그 의미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의 윤리 문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개인은 돈을 벌고, 쓰는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한 개인은 돈 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의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 영향력이 있을 수 없다. 분배의 문제도 추상화·객관화된 체제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며, 이것이 현실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윤리문제와 개인문제는 경제체제의 문제에 잠식되고, 현 상태의 불가피성이 필연적으로 긍정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돈과 관련된 행위들은 정당화 된다.

그러나 경제체제, 예컨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무엇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거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돈 문제를 경제체제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자 비겁한 태도이다. 이는 인간적 차원을 도외시한 해결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은 중립이며, 체제는 인간 존재와 무관하게 추상화된 개체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열정 때문에 결국 인간이 같은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한 맑시즘에 따라 사회가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를 부패시킬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한 길은 독재인데, 독재는 인간성을 말살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체제를 통해 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며, 위선과 비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도피처를 제공받는다. 체제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간은 돈 문제에 직면해서 자신의 모습에 책임져야 함에도 집단참여의 메커니즘, 즉 체제를 향해 공동행위를 하는 것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마음 놓고 죄를 짓게 된다. 또한 반대로 개인적 반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개인행동이 전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정치·경제적 집단행동이 더 좋은 해결책이라는 증거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신실한 반응으로 역사의 흐름을 변하게 하려는 시도를 막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힘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집단행위나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기 개인의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개인적·집단적 삶 전체를 돈에 예속시켰다. 물론 반대로 돈이 이들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를 정확히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본주의에 집착할 수 없다. 우리는 돈의 우월성, 경제활동의 우선성, 기술발전의 우위성을 거부하고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매우 타당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사회주의 역시 경제 우선주의로서, 인간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또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돈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국가라는 단위에서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결국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도리어 체제는 인간과 돈의 관계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있다. 유일하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인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옳지 않다.

성경은 특정체제의 우월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체제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항상 회의를 가지고 그 체제가 기독교적 귀결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체제의 실패일 뿐 기독교의 실패는 아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 현실을 근거로 어떤 체제를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에는 이상이 있을 수 없으며, 구체적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경제체제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독교가 돈 문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목표인 하나님의 일은 사회·경제적 조직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체계적 결론을 끌어내기보다, 성경의 질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화에는 체계는 없지만 진리를 전한다. 진리는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그 진리에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에서, 첫째, 그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고찰해서는 안 되며, 둘째, 이것이 단순히 사람과 돈의 관계의 문제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본질적으로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셋째, 그 본문의 결과 우리를 어떠한 길로 이끌지만, 이는 해결이 아니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해답을 얻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 살게 하시는데, 이는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소명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중세교회와 비잔틴교회, 정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 전체를 기독교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이 은혜 위에 서게 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피조물이 타락하는 한 그 꿈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루터교에서는 세상과 단절된 태도를 취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성육신이 결여되어 있으며,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세상에 살도록 부름 받았기에 돈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게 되고, 믿음과 사회생활을 중재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개신교의 한 편에서는 돈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미국에 넓게 퍼진 생각이다. 그러나 돈과 축복은 하나님의 자유처분임에도 이를 일치시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에서는 관리인(청지기)이라는 개념이 퍼져있다. 그러나 선한 관리인은 타락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선한 관리인으로서 우리가 모든 재물을 보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 또한 재물의 관리에서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재물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한에서 유익하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좌절된다. 성경은 체계가 아닌 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집결되는 한 점이 창조될 따름이며, 여기에는 이론적 고착화가 있을 수 없다. 앞의 두 이론은 세상의 승리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돈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비인격적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세상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이론을 배척하더라도, 그 스스로도 새로운 추상적 이론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를 재발견하는 자로서, 교회가 현실과 부딪혀야 한다. 우리는 그 현실을 잃어버렸었다.

<아...>

자크엘륄의 탁월한 견해. 기독교적 해결 방식이 체제에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태도. 이것은 성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텍스트로만 보기보다, 모순과 양가적 기술이 포함된, 그래서 세상의 전부를 포괄할 수 있는 초월적 텍스트로 읽는 것(일종의 상반구조적 기술이랄까...). 그러므로 성경이 어느 하나의 인간의 체제를 옹호할 수는 없게 된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감각.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성경에서 타당한 근거를 찾아 설명하는 것. 성경에서 대전제를 추려내 연역해나갈 것이 아니라, 직접 현실에 거하며 매순간 현실과 성경의 대화를 중재할 것.

이러한 자크엘륄의 사상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분히 발견된다.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부터가 그 시작.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무작정 반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약점. 스스로 성경을 체계와 집단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분리하려다 보니 모든 해결책을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는 오류에 취약. 그리고 상반적인 그 성경을 어떻게 근거로 사용해서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결여.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그의 생각이 현실을 분석하는 힘에 있어서는 다른 이론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훨씬 정확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