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부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언급을 하고 있다. 첫째는 신약과 구약사이의 모순이다. 신약은 부가 정죄되나, 구약은 그 반대이다. 둘째는 구약에서 부자와 부에 대한 판단 사이의 모순이다. 부는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나, 부자는 정죄된다.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의 부자의 의는 윤리적 덕행이나 부의 바른 사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부가 긍정된다는 것이다.

1. 의로운 부자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안정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났다. 물론 그가 재물을 많이 들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결코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롯과의 이별에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사람으로부터 재물의 축복을 누리려하지 않았는데, 이는 소돔왕과의 만남에서 잘 나타난다. 아브람이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만이 온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으로부터 재물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방세력이나 국가로부터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는 세상 권세가 교회에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욥기에서 부는 처음부터 유혹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탄은 욥이 의로운 이유가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참소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난을 벗어나야 종교도 추구할 수 있다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욥은 사탄의 시험에 대해 재물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그는 재물을 잃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을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신적인 부이며, 이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직무상 권력과 재물을 구할 수 있었지만, 지혜를 선택했다. 실제 그의 일을 위해서는 재물보다 성령이 필요했다. 이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솔로몬이 아브람이나 욥과 다른 것은 그가 전무후무한 부를 누리게 된다는 점인데, 이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가 하나의 표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는 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권능과 영광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따라서 솔로몬이 부한 가운데 의로운 자로 인정된 것은 그의 재물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부가 불행한 결말을 가져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즉, 부가 초래하는 모순은 개인이나 국가가 마찬가지이며, 국가는 백성들을 더 착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솔로몬이 미래의 표징일지라도 그의 행위는 역시 인간의 행위일 따름이다.


2. 부의 윤리

부가 의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약에는 분명 부의 윤리가 있다. 그 출발점은 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원하시는 대로 처분하시고, 선택한 자에게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재물이 속하였음을 인정하든지 부인하는 두 선택만이 있다. 부의 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부의 윤리를 창출할 수 없다.

이러한 출발점은 곧 윤리의 한계점이기도 한데, 부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고백이 없다면 위선적이 된다. 부자가 스스로의 행실로 의롭게 여긴다면 그는 불의한 자가 된다. 오직 부 전체를 하나님께 돌리고 가난해 질 때,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의롭게 인정될 수 있다. 우리가 문제의 핵심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준수하려 한다면 이는 도리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십계명 중 첫 계명은 부를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회의주의를 표현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부를 구할 때 듣지 않으시며,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도만을 구해야 한다(잠30:8). 이러한 윤리적 판단은 사회`경제 질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적`윤리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자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재물이 노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는 악이 아니라 유혹이다. 이 말은 부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악을 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우선 사람은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 신뢰를 두는 경향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 많은 재물이 있는 채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란 어렵다. 또한 부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며, 거부하게 만든다. 우리는 부를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으로 여기는데, 여기에는 빈부의 차이가 없이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로써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려 한다(호1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셔서 그 거짓됨을 드러내신다(호12:9). 재물은 결코 자신이 일한 대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거나, 정직하게 벌었기에 의인이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부의 윤리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으며, 성경이 그 기준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적으로 어떤 부의 의와 불의를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의 윤리는 재산의 사용에 대해서도 적용되는데, 부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돌봐야 할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자의 행동이 그의 덕행이 될 수 없다. 이에 앞서 부자는 먼저 하나님이 모든 부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한다(잠3:9). 그래서 돈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정죄된다. 또한 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채는 자에게도 저주가 임한다(미3:11). 오늘날 교회가 자본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생각해보라.

재물의 사용에 있어 부의 윤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부를 가치 있게, 또는 무가치하게 보는 성경의 모순된 관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돈은 유용하므로 거부할 이유가 없다(잠10:15). 그러나 돈으로 이룬 것은 쉽게 사라진다는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잠18:11).

부가 무가치하다고 할 때, 이는 첫째로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전5:10). 돈의 히브리어 단어는 탐낸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미 영적인 위력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부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이는 더 나아가 권력과 초월과 확신에 대한 불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재물은 궁극적으로 무익하고 무상하기 때문이다(잠11:4, 시49:6, 7). 이러한 것들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통합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행동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그의 부를 곤경에 빠뜨려 모든 소유와 공적을 장악하시려 하지만, 인간은 부를 통해 여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절망일 뿐이다.



<아...>

구약의 부자는 부를 의롭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였기에 부가 긍정된다는 중요한 통찰. 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부의 창출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경제적 제1요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위한 돈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시는 부는 다를 수 있다. 부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쓸 수 있다면 양이 문제는 아닐 것.
그 길은 바로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하는 것. 여기에는 부자의 어떠한 의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헌법상 빈자의 물질적 청구권이 긍정된다. 빈자이기에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
부는 권세이기에 우리에게 무익한 방향으로 이끌려하는 기제가 된다. 여기에 대항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
어쨌든 계속되는 자크엘륄의 개인주의적 부의 윤리관은 집단적 윤리, 집단적 부의 통제의 가능성을 차치한다는 느낌을 준다. 성경은 개인주의적인가? 당대에 개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것. 성경의 적용을 생각할 때 개인주의적인 부분에 머무르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


“돈”의 문제는 사회의 경제체제를 고려해야 하며,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생활이 돈과 연관되어 있다. 돈은 총체적인 경제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돈이 추상화·객관화되어 그 의미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의 윤리 문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개인은 돈을 벌고, 쓰는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한 개인은 돈 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의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 영향력이 있을 수 없다. 분배의 문제도 추상화·객관화된 체제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며, 이것이 현실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윤리문제와 개인문제는 경제체제의 문제에 잠식되고, 현 상태의 불가피성이 필연적으로 긍정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돈과 관련된 행위들은 정당화 된다.

그러나 경제체제, 예컨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무엇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거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돈 문제를 경제체제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자 비겁한 태도이다. 이는 인간적 차원을 도외시한 해결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은 중립이며, 체제는 인간 존재와 무관하게 추상화된 개체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열정 때문에 결국 인간이 같은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한 맑시즘에 따라 사회가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를 부패시킬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한 길은 독재인데, 독재는 인간성을 말살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체제를 통해 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며, 위선과 비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도피처를 제공받는다. 체제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간은 돈 문제에 직면해서 자신의 모습에 책임져야 함에도 집단참여의 메커니즘, 즉 체제를 향해 공동행위를 하는 것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마음 놓고 죄를 짓게 된다. 또한 반대로 개인적 반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개인행동이 전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정치·경제적 집단행동이 더 좋은 해결책이라는 증거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신실한 반응으로 역사의 흐름을 변하게 하려는 시도를 막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힘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집단행위나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기 개인의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개인적·집단적 삶 전체를 돈에 예속시켰다. 물론 반대로 돈이 이들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를 정확히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본주의에 집착할 수 없다. 우리는 돈의 우월성, 경제활동의 우선성, 기술발전의 우위성을 거부하고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매우 타당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사회주의 역시 경제 우선주의로서, 인간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또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돈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국가라는 단위에서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결국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도리어 체제는 인간과 돈의 관계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있다. 유일하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인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옳지 않다.

성경은 특정체제의 우월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체제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항상 회의를 가지고 그 체제가 기독교적 귀결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체제의 실패일 뿐 기독교의 실패는 아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 현실을 근거로 어떤 체제를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에는 이상이 있을 수 없으며, 구체적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경제체제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독교가 돈 문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목표인 하나님의 일은 사회·경제적 조직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체계적 결론을 끌어내기보다, 성경의 질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화에는 체계는 없지만 진리를 전한다. 진리는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그 진리에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에서, 첫째, 그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고찰해서는 안 되며, 둘째, 이것이 단순히 사람과 돈의 관계의 문제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본질적으로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셋째, 그 본문의 결과 우리를 어떠한 길로 이끌지만, 이는 해결이 아니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해답을 얻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 살게 하시는데, 이는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소명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중세교회와 비잔틴교회, 정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 전체를 기독교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이 은혜 위에 서게 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피조물이 타락하는 한 그 꿈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루터교에서는 세상과 단절된 태도를 취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성육신이 결여되어 있으며,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세상에 살도록 부름 받았기에 돈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게 되고, 믿음과 사회생활을 중재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개신교의 한 편에서는 돈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미국에 넓게 퍼진 생각이다. 그러나 돈과 축복은 하나님의 자유처분임에도 이를 일치시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에서는 관리인(청지기)이라는 개념이 퍼져있다. 그러나 선한 관리인은 타락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선한 관리인으로서 우리가 모든 재물을 보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 또한 재물의 관리에서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재물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한에서 유익하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좌절된다. 성경은 체계가 아닌 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집결되는 한 점이 창조될 따름이며, 여기에는 이론적 고착화가 있을 수 없다. 앞의 두 이론은 세상의 승리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돈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비인격적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세상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이론을 배척하더라도, 그 스스로도 새로운 추상적 이론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를 재발견하는 자로서, 교회가 현실과 부딪혀야 한다. 우리는 그 현실을 잃어버렸었다.

<아...>

자크엘륄의 탁월한 견해. 기독교적 해결 방식이 체제에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태도. 이것은 성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텍스트로만 보기보다, 모순과 양가적 기술이 포함된, 그래서 세상의 전부를 포괄할 수 있는 초월적 텍스트로 읽는 것(일종의 상반구조적 기술이랄까...). 그러므로 성경이 어느 하나의 인간의 체제를 옹호할 수는 없게 된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감각.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성경에서 타당한 근거를 찾아 설명하는 것. 성경에서 대전제를 추려내 연역해나갈 것이 아니라, 직접 현실에 거하며 매순간 현실과 성경의 대화를 중재할 것.

이러한 자크엘륄의 사상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분히 발견된다.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부터가 그 시작.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무작정 반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약점. 스스로 성경을 체계와 집단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분리하려다 보니 모든 해결책을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는 오류에 취약. 그리고 상반적인 그 성경을 어떻게 근거로 사용해서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결여.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그의 생각이 현실을 분석하는 힘에 있어서는 다른 이론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훨씬 정확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책소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 대장간 홈페이지(http://daejanggan.org/shop/item.php?it_id=1228370861)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경제체제를 고쳐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이며,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의 대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은신생활이 아니며 부자가 되어 돈의 권세를 장악하는 길도 아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매매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책속에서-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께서 돈(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급진적으로 도전하는 이 책은, 돈을 지폐나 동전 등 눈에 보이는 돈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듯 돈에게 '도움(구입능력)'을 원하게 되는 우리 현실을 꼬집는다. 돈으로 의식주는 물론 건강 등 노후보장까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돈은 이미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듯 그리스도인은 도 주인(내지는 두 경향성)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도, 돈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냐? 돈이냐?' 를 물으며,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책.
-월간 새가정 2월호에서 발취-
 
 
 
 
[저자 소개]

자끄 엘륄 (Jacques Ellul, 1912년 1월 6일 ~ 1994년 5월 19일) 은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지성인의 행동강령을 말한 프랑스 지성으로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적 접근과 기독교의 가치관을 조화시킨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이자 실천가였다. 

1912년 프랑스 보르도 출생했으며, 1937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연구부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비시 프랑스 (Vichy France)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고,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했다. 1953년부터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 임원으로 일해왔다. 

법학박사인 그는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보르도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 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사후인 2002년 이스라엘의 얏 바셈(Yad Vashem)재단에 의해 나치 치하의 유대인 가족들을 위험을 무릎쓰고 도와준 것이 밝혀져 "열방가운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학자로서 기술(technique)에 대한 개념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하였으며, 법과 제도, 자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였으며 기독교인으로서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1990년도(세상속의 그리스도인(1990),뒤틀려진 기독교(1991),하나님이냐 돈이냐(1992)(대장간출판사)부터 주로 신학관련 서적이 소개되었으며 최근 기술체계, 맑스와 예수등 사회와 역사 서적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2009. 대장간)는 엘륄의 유작으로 영미권보다 한국어도 먼저 번역 소개되었다.

[옮긴이]
 
양명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감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개신교 신학부졸업)에서 신학박사 학위(학위논문- 윤리의 근거와 기술 유토피아)를 취득했다. 사회 정의론과 문명론, 프랑스 철학과  해석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학을 비롯한 한국 사상에 바탕을 둔 신학을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
-<호모 테크니쿠스 - 기술, 환경, 윤리>(한국신학연구소)
-<기독교사회정의론 - 갸륵하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녹색윤리 - 인권과 자연권>(서광사)
-<근대성과 종교 - 세계화 시대의 문명읽기>(이화여대출판부)
-<욥이 말하다 - 고난의 신비와 신학이야기>(분도출판사)
 
역서
-<악의상징>(문학과 지성사)
-<해석의 갈등>(아카넷)
-<인간현상>(한길사)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원함과 행함>(솔로몬) 등
 
 
[차례]
 
역자서문 10
1장 문제해결의 실마리 13
2장 구약성경에서의 부 47
      1. 의로운 부자들 51
      2. 부의 윤리 61
      3. 보상과 축복으로서의 부 79
      4. 성례로서의 부 89
3장 하나님이냐 돈이냐 105
      1. 돈의 권세 107
      2. 돈의 유혹 132
      3. 그리스도인의 선택 143
4장 돈에 대한 교육 169
      1. 돈의 유혹에 단련시키는 교육 171
      2.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교육 179
      3. 자족하는 삶 189
5장 부자와 가난한 자 199
      1. 부자 201
      2. 가난한 자 207
      3.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응답 222
      4. 명상 237
후기 243

바로가기: http://daejanggan.org/shop/item.php?it_id=1228370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