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부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언급을 하고 있다. 첫째는 신약과 구약사이의 모순이다. 신약은 부가 정죄되나, 구약은 그 반대이다. 둘째는 구약에서 부자와 부에 대한 판단 사이의 모순이다. 부는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나, 부자는 정죄된다.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의 부자의 의는 윤리적 덕행이나 부의 바른 사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부가 긍정된다는 것이다.

1. 의로운 부자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안정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났다. 물론 그가 재물을 많이 들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결코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롯과의 이별에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사람으로부터 재물의 축복을 누리려하지 않았는데, 이는 소돔왕과의 만남에서 잘 나타난다. 아브람이 소돔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만이 온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으로부터 재물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방세력이나 국가로부터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는 세상 권세가 교회에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욥기에서 부는 처음부터 유혹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탄은 욥이 의로운 이유가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참소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난을 벗어나야 종교도 추구할 수 있다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욥은 사탄의 시험에 대해 재물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그는 재물을 잃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물을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신적인 부이며, 이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직무상 권력과 재물을 구할 수 있었지만, 지혜를 선택했다. 실제 그의 일을 위해서는 재물보다 성령이 필요했다. 이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솔로몬이 아브람이나 욥과 다른 것은 그가 전무후무한 부를 누리게 된다는 점인데, 이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가 하나의 표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는 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권능과 영광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따라서 솔로몬이 부한 가운데 의로운 자로 인정된 것은 그의 재물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부가 불행한 결말을 가져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즉, 부가 초래하는 모순은 개인이나 국가가 마찬가지이며, 국가는 백성들을 더 착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솔로몬이 미래의 표징일지라도 그의 행위는 역시 인간의 행위일 따름이다.


2. 부의 윤리

부가 의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약에는 분명 부의 윤리가 있다. 그 출발점은 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원하시는 대로 처분하시고, 선택한 자에게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재물이 속하였음을 인정하든지 부인하는 두 선택만이 있다. 부의 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부의 윤리를 창출할 수 없다.

이러한 출발점은 곧 윤리의 한계점이기도 한데, 부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고백이 없다면 위선적이 된다. 부자가 스스로의 행실로 의롭게 여긴다면 그는 불의한 자가 된다. 오직 부 전체를 하나님께 돌리고 가난해 질 때,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의롭게 인정될 수 있다. 우리가 문제의 핵심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준수하려 한다면 이는 도리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십계명 중 첫 계명은 부를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회의주의를 표현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부를 구할 때 듣지 않으시며,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도만을 구해야 한다(잠30:8). 이러한 윤리적 판단은 사회`경제 질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적`윤리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자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재물이 노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는 악이 아니라 유혹이다. 이 말은 부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악을 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우선 사람은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 신뢰를 두는 경향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 많은 재물이 있는 채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란 어렵다. 또한 부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며, 거부하게 만든다. 우리는 부를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으로 여기는데, 여기에는 빈부의 차이가 없이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로써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려 한다(호1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셔서 그 거짓됨을 드러내신다(호12:9). 재물은 결코 자신이 일한 대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거나, 정직하게 벌었기에 의인이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부의 윤리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으며, 성경이 그 기준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적으로 어떤 부의 의와 불의를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의 윤리는 재산의 사용에 대해서도 적용되는데, 부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돌봐야 할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자의 행동이 그의 덕행이 될 수 없다. 이에 앞서 부자는 먼저 하나님이 모든 부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한다(잠3:9). 그래서 돈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정죄된다. 또한 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채는 자에게도 저주가 임한다(미3:11). 오늘날 교회가 자본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생각해보라.

재물의 사용에 있어 부의 윤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부를 가치 있게, 또는 무가치하게 보는 성경의 모순된 관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돈은 유용하므로 거부할 이유가 없다(잠10:15). 그러나 돈으로 이룬 것은 쉽게 사라진다는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잠18:11).

부가 무가치하다고 할 때, 이는 첫째로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전5:10). 돈의 히브리어 단어는 탐낸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미 영적인 위력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부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이는 더 나아가 권력과 초월과 확신에 대한 불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재물은 궁극적으로 무익하고 무상하기 때문이다(잠11:4, 시49:6, 7). 이러한 것들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통합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행동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그의 부를 곤경에 빠뜨려 모든 소유와 공적을 장악하시려 하지만, 인간은 부를 통해 여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절망일 뿐이다.



<아...>

구약의 부자는 부를 의롭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였기에 부가 긍정된다는 중요한 통찰. 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부의 창출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경제적 제1요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위한 돈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시는 부는 다를 수 있다. 부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쓸 수 있다면 양이 문제는 아닐 것.
그 길은 바로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하는 것. 여기에는 부자의 어떠한 의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헌법상 빈자의 물질적 청구권이 긍정된다. 빈자이기에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
부는 권세이기에 우리에게 무익한 방향으로 이끌려하는 기제가 된다. 여기에 대항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
어쨌든 계속되는 자크엘륄의 개인주의적 부의 윤리관은 집단적 윤리, 집단적 부의 통제의 가능성을 차치한다는 느낌을 준다. 성경은 개인주의적인가? 당대에 개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것. 성경의 적용을 생각할 때 개인주의적인 부분에 머무르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