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학교 캠퍼스를 거닐다가 하루에 전도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는 분의 모습이나 전단지를 보니까 같은 단체이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입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갔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해도 붙잡기도 하고, 어떻게 전도하나싶어 궁금하기도 하여 "전도를 당했습니다".

 전도하시던 분들은 청년목회로 유명한 모 교회 지체들이었습니다. 당시가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 기간이라 아마도 장래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자를 만났을 때 분명히 기독교인이고 교회를 잘 다니고 있다고 말했음에도 그 지체는 제게 "전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라는 것이 순전히 교회 자랑이었는데, 무엇무엇이 너무 재미있다느니, 청년이 많아서 너무 재미있을 거라느니, 재미를 빼면 사실 들은 "도"가 없었습니다.

 순간 기분이 좀 나빠서 저는 교회 잘 다닐테니까, "전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멀리서 그 분이 다른 학생들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열에 아홉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 자랑이요, 교인 빼가기 였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담임목사님 자랑도 하셨는데, 목사님께 어떤 복음을 받았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대적으로 칭찬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리스 지방의 본(model) 교회라고까지 칭하고 있습니다(7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 "재미있게" 지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일으키고, 사랑으로써 수고하고 헌신하기를 아끼지 않으며, 소망으로써 어떠한 고난도 감내하고 살아내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런데 그들이 확실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러한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온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말로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이되었고,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종과 같은 모양으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5절).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닮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 있습니다(6절). 그래서 복음을 받는 자는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온전하여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애쓰고 수고하고 인내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러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한 명의 사람도 그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4절).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새벽이슬은 선교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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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디와 Simon Dominic 음악 2010. 10. 13. 03:44

매일 보는 건 아니지만, TV를 좋아하는 관계로 예능 프로그램 재방을 자주 보곤 한다.
특히 초창기부터 신선한 포맷이 재미있었던 뜨.형.
내용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예능 초보인 몇몇이 적응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보기도 했다.
특히, 쌈디.
-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오글오글 할까 하는 마음으로 봤다.
뭐랄까, 왠지 친구가 방송에 나오는데 뭔 지랄을 하나 보자 하는 마음이랄까? ^^;;
나름 캐릭터도 잘 잡고 안정적으로 방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연예인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쌈디는 Simon Dominic으로 먼저 알았다.
언더힙합에서 한창 유명할 때 나에게도 유명해진 그였다.
요즘 슈프림팀에서도 안정적인 랩을 보여주고 있지만, swagger는 예전만 못하다.
- 나도 힙합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언더에서는 유려한 flow에 micro한 랩핑을 보여주며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아는 현재의 쌈디는 정직한 랩과 안정적인 보컬을 보여줄 뿐이다.
공중파 가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분명 아쉽기도 하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아직까지 슈프림팀의 결과물에서 쌈디가 확실히 E-sens의 서브로 느껴지는 건 나뿐인지...
개인적으로 모든 일은 노가다라고 생각하는데, 쌈디의 잦은 외출이 그를 랩 노동자에서 조금은 해방시킨 것 같다.

지금은 나름 예능에서 선전하고, 노래로도 다운로드 1위에 오르고, 힙합계의 업적을 쌓아가고 있지만,
예전의 그의 스타일이 그립긴하다.
어쩌랴. 가수, 그것도 아직 좁은 저변의 힙합음악인의 숙명인 것을.
덕분에 돈도 인기도 얻을테니 조금의 보상은 되겠지.

아쉬움에 그의 옛 목소리를 감상해보자.










* 책소개


1. 운명의 근대적 형식으로서의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
근대 이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정권의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운명을 규정하는 확실성의 지표가 상실된 곳에서 등장해 왔다. 자연철학의 등장과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잠시 빛을 발했던 민주주의는 중세 암흑의 시대를 거친 후, 르네상스와 근대 인간 중심의 철학의 탄생 이후에나 다시 그 빛을 낼 수 있었다. 신의 섭리, 절대 이성이 훼손된 이후, 다양한 신들이 싸우고 있는, 확실성의 지표가 상실된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야, ‘정치’는 그리고 ‘민주주의’는 인간의 삶과 운명을 규정하는 가장 혼란스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형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의 말씀’이나 ‘철인’이 아닌 정치와 민주주의다. 이 점에서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가장 혼란스러운 형식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공동체를 건설해야 할 얄궂은 상황과 대면하고 있다.

2. 민주주의, 그 끝나지 않는 논쟁의 역사
흔히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 혹은 ‘인민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누가 인민인가?’ ‘인민의 권력이 행사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게다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름만을 갖고 있지 않다. 직접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 보호민주주의, 계발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법치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등등. 이처럼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은 그 내용과 실천을 둘러싼 길고도 치열한 다툼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 이론은 광범위한 연구와 논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앞에 따라붙은 다양한 수식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수식어들은 민주주의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며, 또한 얼마나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있을까?
사실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이 책 역시 이런 질문들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이 책은 그간 역사적으로 등장했고 실험되었던 다양한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구체적 실천의 내용들을 유형화ㆍ모델화함으로써, 각 모델들이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도화되고 관성화된 민주주의의 의미에 파열을 내고, 우리가 잊고 있거나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3. 민주주의의 모델‘들’
오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선출, 여야 간의 정권 교체,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 조건 내지 절차는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말해진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치열한 다툼과 희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있다. 나아가, 이상적 모델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의 작동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혼란을 겪고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우리보다 앞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사회들에서 전개되었던 깊은 사색의 결과물들을 통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역사상 존재해 왔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춘 여러 모델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열 가지 모델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그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있다.

4. 민주주의의 모델들(제3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1987년에 초판이 출판된 이래 1996년과 2006년 각각 개정되었으며, 이번 번역서는 2006년의 개정판을 완역한 것이다. 헬드의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독본으로서, 전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되었으며 많은 찬사를 받아 왔다. 고대 아테네에서 현대의 숙의 민주주의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역사적 민주주의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물론,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론과 현실의 역사를 대중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미 1988년에 초판이 『민주주의 모델』(인간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개론서로서 많이 활용되어 왔다. 개정판들은 모두 시대적인 변화와 새롭게 발굴된 역사적 자료와 연구 성과를 담기 위해 개정되었다. 이번에 새롭게 번역된 이 책은 새롭게 추가되고 개정된 내용은 물론, 기존 번역본을 참고해 오류들을 최대한 바로 잡았으며, 상세한 옮긴이 주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듯,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민주주의’의 사상과 실천을 중심 주제로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정치의 가장 보편적 형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치학에 대한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운명의 근대적 형식으로서의 정치와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독자들이 민주주의와 정치의 다양한 상상력과 실천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저자소개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

영국 출신의 정치학자로서, 방송통신대학교(Open University)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 정치학부(Government Department)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비판 이론에서 출발한 그의 학문적 관심은 민주주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세계화 시대의 국제 질서, 전 지구적 거버넌스와 민주주의 문제 등에 천착하여 아치부기(D. Archibugi)와 함께 ‘세계시민 민주주의’의 주창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비판 이론 입문 : 호르크하이머에서 하바마스까지』(1989), 『정치 이론과 현대 국가』(1989), 『세계시민 민주주의』(공저, 1995), 『전 지구적 변환』(공저, 1999), 『지구 규약 : 워싱턴 합의에 대한 사민주의적 대안』(2004)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박찬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의회정치와 민주주의』(2002),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2007), 『어떤 민주주의인가』(공저, 2007)가 있다.


* 목차

1부 고전적 모델들

1장 고전적 민주주의 : 아테네
정치적 이상과 목표
제도적 특징
고대 민주주의의 배타성
비판

2장 공화주의 : 자유, 자치 그리고 적극적 시민
정치적 동물의 쇠락과 재등장
공화주의의 개조
공화주의, 선출제 정부 그리고 인민주권
시민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시민적 영광으로
공화국과 일반 의사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3장 자유민주주의의 전개 : 국가에 대한 지지와 반대
권력과 통치권(주권)
시민권과 입헌 국가
권력분립
파벌의 문제
책임과 시장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개
전제 권력과 과대 성장 국가의 위험
대의 정부
여성의 종속
‘정부의 목표’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

4장 직접민주주의와 정치의 종식
계급과 계급투쟁
진보로서의 역사와 자본주의 발전
국가에 관한 두 이론
정치의 종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


2부 20세기 이후의 변형

5장 경쟁적 엘리트주의와 기술 관료적 비전
계급, 권력 그리고 갈등
관료제, 의회 그리고 국민 국가
경쟁적 엘리트주의 민주주의
기로에 선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최후의 흔적?
민주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고전적’ 민주주의 대 현대 민주주의
기술 관료적 전망

6장 다원주의, 법인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
집단 정치, 정부 그리고 권력
정치, 합의 그리고 권력 분포
민주주의, 법인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
축적, 정당화 그리고 제한된 정치 영역
대의제도의 형태 변화

7장 전후의 안정에서 정치적 위기로 : 정치적 이상의 양극화
정통성 있는 민주적 질서인가 억압적 정체인가?
과부하 국가인가 정당화의 위기인가?
위기 이론 : 평가
법,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참여,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8장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적 배경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의 승리인가?
새롭게 요구되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9장 숙의 민주주의와 공공 영역의 옹호
이성과 참여
민주주의 이론의 한계
숙의 민주주의의 목표
올바른 공적 논증이란? 불편부당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숙의 민주주의 제도
가치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3부 오늘날 민주주의의 의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10장 민주적 자치
민주주의의 매력
자치의 원칙
원칙의 실행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과 20세기 민주주의 이론의 유산
민주주의 : 양면의 과정
민주적 자치 : 양립 가능한 것과 양립 불가능한 것

11장 민주주의, 국민 국가, 전 지구적 체제
민주적 정통성과 국경
지역적, 전 세계적 흐름 : 과거와 현재의 비교
주권, 자치 그리고 괴리
보다 전 지구적인 시대에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함 : 세계시민 민주주의
유토피아적 기획?

원문 : http://www.humanitasbook.co.kr/book/?mode=view&no=102&sort=&p=2&mcat=&scat=&search=&word=


“돈”의 문제는 사회의 경제체제를 고려해야 하며,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생활이 돈과 연관되어 있다. 돈은 총체적인 경제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돈이 추상화·객관화되어 그 의미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의 윤리 문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개인은 돈을 벌고, 쓰는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한 개인은 돈 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의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 영향력이 있을 수 없다. 분배의 문제도 추상화·객관화된 체제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며, 이것이 현실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윤리문제와 개인문제는 경제체제의 문제에 잠식되고, 현 상태의 불가피성이 필연적으로 긍정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돈과 관련된 행위들은 정당화 된다.

그러나 경제체제, 예컨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무엇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거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돈 문제를 경제체제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자 비겁한 태도이다. 이는 인간적 차원을 도외시한 해결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은 중립이며, 체제는 인간 존재와 무관하게 추상화된 개체인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열정 때문에 결국 인간이 같은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한 맑시즘에 따라 사회가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를 부패시킬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한 길은 독재인데, 독재는 인간성을 말살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체제를 통해 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허구이며, 위선과 비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도피처를 제공받는다. 체제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간은 돈 문제에 직면해서 자신의 모습에 책임져야 함에도 집단참여의 메커니즘, 즉 체제를 향해 공동행위를 하는 것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마음 놓고 죄를 짓게 된다. 또한 반대로 개인적 반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개인행동이 전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정치·경제적 집단행동이 더 좋은 해결책이라는 증거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신실한 반응으로 역사의 흐름을 변하게 하려는 시도를 막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힘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집단행위나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기 개인의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개인적·집단적 삶 전체를 돈에 예속시켰다. 물론 반대로 돈이 이들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를 정확히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본주의에 집착할 수 없다. 우리는 돈의 우월성, 경제활동의 우선성, 기술발전의 우위성을 거부하고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매우 타당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사회주의 역시 경제 우선주의로서, 인간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또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돈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국가라는 단위에서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결국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도리어 체제는 인간과 돈의 관계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있다. 유일하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인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옳지 않다.

성경은 특정체제의 우월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체제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항상 회의를 가지고 그 체제가 기독교적 귀결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체제의 실패일 뿐 기독교의 실패는 아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 현실을 근거로 어떤 체제를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에는 이상이 있을 수 없으며, 구체적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경제체제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독교가 돈 문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목표인 하나님의 일은 사회·경제적 조직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체계적 결론을 끌어내기보다, 성경의 질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화에는 체계는 없지만 진리를 전한다. 진리는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그 진리에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에서, 첫째, 그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고찰해서는 안 되며, 둘째, 이것이 단순히 사람과 돈의 관계의 문제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본질적으로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셋째, 그 본문의 결과 우리를 어떠한 길로 이끌지만, 이는 해결이 아니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해답을 얻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 살게 하시는데, 이는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소명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중세교회와 비잔틴교회, 정교회는 사회와 교회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 전체를 기독교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이 은혜 위에 서게 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피조물이 타락하는 한 그 꿈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루터교에서는 세상과 단절된 태도를 취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성육신이 결여되어 있으며,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세상에 살도록 부름 받았기에 돈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게 되고, 믿음과 사회생활을 중재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개신교의 한 편에서는 돈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미국에 넓게 퍼진 생각이다. 그러나 돈과 축복은 하나님의 자유처분임에도 이를 일치시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에서는 관리인(청지기)이라는 개념이 퍼져있다. 그러나 선한 관리인은 타락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선한 관리인으로서 우리가 모든 재물을 보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 또한 재물의 관리에서 배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재물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한에서 유익하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경제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좌절된다. 성경은 체계가 아닌 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집결되는 한 점이 창조될 따름이며, 여기에는 이론적 고착화가 있을 수 없다. 앞의 두 이론은 세상의 승리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는 돈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비인격적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세상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이론을 배척하더라도, 그 스스로도 새로운 추상적 이론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를 재발견하는 자로서, 교회가 현실과 부딪혀야 한다. 우리는 그 현실을 잃어버렸었다.

<아...>

자크엘륄의 탁월한 견해. 기독교적 해결 방식이 체제에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태도. 이것은 성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텍스트로만 보기보다, 모순과 양가적 기술이 포함된, 그래서 세상의 전부를 포괄할 수 있는 초월적 텍스트로 읽는 것(일종의 상반구조적 기술이랄까...). 그러므로 성경이 어느 하나의 인간의 체제를 옹호할 수는 없게 된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감각.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성경에서 타당한 근거를 찾아 설명하는 것. 성경에서 대전제를 추려내 연역해나갈 것이 아니라, 직접 현실에 거하며 매순간 현실과 성경의 대화를 중재할 것.

이러한 자크엘륄의 사상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분히 발견된다.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부터가 그 시작.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무작정 반기독교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약점. 스스로 성경을 체계와 집단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분리하려다 보니 모든 해결책을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는 오류에 취약. 그리고 상반적인 그 성경을 어떻게 근거로 사용해서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결여.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그의 생각이 현실을 분석하는 힘에 있어서는 다른 이론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훨씬 정확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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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대장간 홈페이지(http://daejanggan.org/shop/item.php?it_id=1228370861)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경제체제를 고쳐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이며,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의 대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은신생활이 아니며 부자가 되어 돈의 권세를 장악하는 길도 아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매매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다.  -책속에서-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께서 돈(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급진적으로 도전하는 이 책은, 돈을 지폐나 동전 등 눈에 보이는 돈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듯 돈에게 '도움(구입능력)'을 원하게 되는 우리 현실을 꼬집는다. 돈으로 의식주는 물론 건강 등 노후보장까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돈은 이미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듯 그리스도인은 도 주인(내지는 두 경향성)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도, 돈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냐? 돈이냐?' 를 물으며,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책.
-월간 새가정 2월호에서 발취-
 
 
 
 
[저자 소개]

자끄 엘륄 (Jacques Ellul, 1912년 1월 6일 ~ 1994년 5월 19일) 은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지성인의 행동강령을 말한 프랑스 지성으로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적 접근과 기독교의 가치관을 조화시킨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이자 실천가였다. 

1912년 프랑스 보르도 출생했으며, 1937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연구부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비시 프랑스 (Vichy France)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다.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고,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했다. 1953년부터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총회 임원으로 일해왔다. 

법학박사인 그는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보르도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 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사후인 2002년 이스라엘의 얏 바셈(Yad Vashem)재단에 의해 나치 치하의 유대인 가족들을 위험을 무릎쓰고 도와준 것이 밝혀져 "열방가운데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학자로서 기술(technique)에 대한 개념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하였으며, 법과 제도, 자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였으며 기독교인으로서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1990년도(세상속의 그리스도인(1990),뒤틀려진 기독교(1991),하나님이냐 돈이냐(1992)(대장간출판사)부터 주로 신학관련 서적이 소개되었으며 최근 기술체계, 맑스와 예수등 사회와 역사 서적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2009. 대장간)는 엘륄의 유작으로 영미권보다 한국어도 먼저 번역 소개되었다.

[옮긴이]
 
양명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감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개신교 신학부졸업)에서 신학박사 학위(학위논문- 윤리의 근거와 기술 유토피아)를 취득했다. 사회 정의론과 문명론, 프랑스 철학과  해석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유학을 비롯한 한국 사상에 바탕을 둔 신학을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
-<호모 테크니쿠스 - 기술, 환경, 윤리>(한국신학연구소)
-<기독교사회정의론 - 갸륵하신 하나님>(한국신학연구소)
-<녹색윤리 - 인권과 자연권>(서광사)
-<근대성과 종교 - 세계화 시대의 문명읽기>(이화여대출판부)
-<욥이 말하다 - 고난의 신비와 신학이야기>(분도출판사)
 
역서
-<악의상징>(문학과 지성사)
-<해석의 갈등>(아카넷)
-<인간현상>(한길사)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원함과 행함>(솔로몬) 등
 
 
[차례]
 
역자서문 10
1장 문제해결의 실마리 13
2장 구약성경에서의 부 47
      1. 의로운 부자들 51
      2. 부의 윤리 61
      3. 보상과 축복으로서의 부 79
      4. 성례로서의 부 89
3장 하나님이냐 돈이냐 105
      1. 돈의 권세 107
      2. 돈의 유혹 132
      3. 그리스도인의 선택 143
4장 돈에 대한 교육 169
      1. 돈의 유혹에 단련시키는 교육 171
      2.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교육 179
      3. 자족하는 삶 189
5장 부자와 가난한 자 199
      1. 부자 201
      2. 가난한 자 207
      3.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응답 222
      4. 명상 237
후기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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