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 하고 술값도 안 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안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 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술값, 신현수


토굴을 찾아서, 김별아, 2011. 12. 17.자 한겨레신문에서.

'보호되지 않는 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이 10월 29일이야 30일이야...  (0) 2010.10.30
오늘 황당하게 한미FTA가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수 년간 이 나라를 격론의 장으로 만들었던 그것이 정말 순식간에 정리되고 말았다.

한미FTA는 단순한 의안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아니, 법률안하고 견주어도 급이 다르다.

대한민국에 미칠 그 영향력에 대하여 아무리 보수적으롤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IMF와 맺은 조약 이후 최대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다.

IMF 당시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180도 바뀌었던 것처럼.

그렇게 대한민국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안을 이렇게 순식간에 날치기로 통과시키다니...

이게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선전하는 선진국의 모습인가...

정말.. 정말.. 한미FTA가 필요하다 손 치더라도

그것이 대의기구인 국회라는 최소한의 절차를 통해

국민적 합의로 비준될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갈 정도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우리 손으로 결정하는 권리마저 앗아갈 정도로 시급한 문제인가.

그렇게 이루어진 선진국이라면 나로서는 도무지 원하고 싶지도 않다.



덧붙여, 오늘 이 사태를 언론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여 MBC 9시 뉴스를 봤는데,

정말.. 이제 다시는 MBC뉴스 따위는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10분이나 다뤘을까? 그 중 대부분은 국회 난장판 얘기로 점철되고,

기억에도 안 남는 뭐가 중요한 지 모르겠는 몇 개의 기사들(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의 비준 이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심각성은 기자의 단 두 마디뿐.

MBC 뉴스의 연성화는 누구 탓인가.

이러고도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입에서 떠나지 않는 곡.

그냥 그렇다고요.

검정치마 - 아침식사.


노래방에 가면 너무 자주 부르는 노래지만,

요즘들어 정말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닿는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비록 지금이 20살의 내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 없는 듯 보이지만,

이제는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다시 닥치면 이젠 아무렇지 않을 일들 사이에서,

30대도 이렇게 지나가겠지.


  * 서문

이 책은 기본권이론에 관한 독일의 중요한 문헌 중 몇 가지를 가려 뽑고 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독일의 기본권이론은 옐리네크의 지위이론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아직도 그 위력은 계속되고 있다. 독일에서의 기본권은 영국이나 미국 또는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그 역사적·정치적 후진성으로 인하여 이들 국가들보다 뒤늦게 발전되었으며 이에 따라 학자들에 의한 이론중심적인 발전을 해온 것이다. 여기에 수록한 13편의 문헌은 독일 기본권이론 중 대표적인 저서와 논문 가운데 일부는 발췌한 형태로 소개하였으나 대부분은 전문을 완역한 것이다.

이 책의 독자는 대학에서 헌법을 이미 공부한 고학년 학생이나 대학원 학생 이상으로 독일의 헌법이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젊은 연구자들을 염두에 두고 편집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현재의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독일의 헌법이론만이 마치 헌법학의 전부인 것같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름이 상당히 알려진 저술가 중에도 독일의 학설과 판례를 그대로 맹목적으로 교과서에 수록하는가 하면, 아예 독일의 교과서를 모델로 해서 만든 유사품 내지는 번안서 같은 책자마저 나돌고 있다.
그런가 하면 헌법재판소의 판결문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그대로 모방하는 정도를 넘어 표절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의 판결을 참고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런 출처나 인용도 없이 자기의 생각인양 공문서를 작성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편찬된 것이다. 즉 원전의 전문을 읽은 후에 자기의 생각으로 이를 검토하고 비판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일의 기본권이론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사회적·문화적 전제 위에서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거나 더구나 [최신]이란 레테르까지 붙여 과대포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학계와 실무계에 이처럼 외국의 이론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며 수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풍조는 하루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의 기본권이론 중 독일의 몇몇 학자들이 생각한 것을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참고자료로 삼아 영국과 미국에서의 권리장전의 전개와 프랑스에서의 인권선언의 발자취도 함께 살펴 보아야할 것이다. 서구의 기본권이론과 실제를 검토한 연후에는 다시 자신의 기본권이론, 나아가서는 한국적인 기본권이론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04년 2월 부산에서
김 효 전


* 목차

제1장 주관적 공권의 체계---게오르그 옐리네크
제2장 기본권과 기본의무---헤르만 헬러

제3장 헌법의 통합적 실질내용 ―특히 기본권---루돌프 스멘트
제4장 바이마르 헌법에 있어서의 자유권과 제도적 보장---칼 슈미트

제5장 공용수용과 사회화---한스 페터 입센
제6장 헌법학의 오늘날 상황에 대해서---에른스트 포르스토프

제7장 급부국가에 있어서의 기본권---페터 해벌레
제8장 기본권이론과 기본권해석---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

제9장 독일연방공화국에 있어서의 외국인의 국법상의 지위---요제프 이젠제
제10장 기본권체계의 이념과 요소---클라우스 슈테른

제11장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기본권---로베르트 알렉시
제12장 과잉금지와 형량요청---클라우스 슈테른

제13장 기본권 보호의무---크리스티안 슈타르크


* 저자 약력

게오르그 옐리네크 (Georg Jellinek, 1851-1911)
라이프치히 출생. 빈, 하이델베르크,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 공부. 187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다. 1879년 빈 대학에서 교수자격취득. 1891년 블룬츨리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다. 독일 공법학의 집대성자로 불린다.

헤르만 헬러 (Hermann Heller, 1891-1933)
오스트리아의 테쉔 출생. 빈, 그라쯔, 인스부르크, 킬 대학에서 법학과 국가학 수학.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에 입대. 1920년 킬 대학에서 교수자격 취득. 1928년 베를린 대학 조교수. 193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정교수.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자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

루돌프 스멘트 (Rudolf Smend, 1882-1975)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 1904년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 취득. 1909년 킬 대학에서 알베르트 해넬의 지도 아래 교수자격취득. 1909년 그라이프스발트, 1911년 튀빙엔, 1915년 본, 1922년 베를린 등지의 교수 역임. 1935년부터 1950년까지 괴팅엔 대학 교수 역임. 한편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독일 복음교회의 고문위원, 1945년부터 1963년까지 개혁교회 연합지도자 회의 위원 등을 지내며 교회법 연구. 국가의 동태적인 파악을 통합이론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칼 슈미트 (Carl Schmitt, 1888-1985)
베스트팔렌주 플레텐베르크 출생. 1910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1914년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미]로 같은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 통과. 1921년 그라이프스발트, 1922년 본, 1928년 베를린 상과대학, 1933년 쾰른, 1933 ~1945년 베를린 대학 교수 역임. 나치스 시대에 추밀고문관 등을 지내고 협력한 죄과 때문에 제2차 대전 후 대학에서 추방되고 고향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작고하였다.

한스 페터 입센 (Hans Peter Ipsen, 1907-1998)
함부르크 출생. 함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국가시험에 합격. 1939년 함부르크 대학 정교수. 1972년 유럽법협회 명예회장. 독일 국법학자협회 명예회장. 자알란트 대학 명예법학박사.

에른스트 포르스토프 (Ernst Forsthoff, 1902-1974)
루르 지방의 두이스부르크 출생. 1930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강사, 1933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원외교수. 1935년 함부르크, 1936년 쾨니히스베르크, 1941년 빈 대학 교수 등을 역임한 후 194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된 이래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칼 슈미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행정법이론은 한국과 일본에 널리 소개되었다.

페터 해벌레 (Peter Häberle, 1934- )
뷔르템베르크주 괴핑겐(Göppingen)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되어 마르부르그 대학 교수를 거쳐 바이로이트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2년에 정년 퇴직하였다. 스멘트학파를 계승하며 그의 제도적 기본권이해와 급부국가의 기본권이론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에른스트 볼프강 뵈켄회르데 (Ernst-Wolfgang Böckenförde, 1930- )
카셀 출생. 1956년 뮌스터 대학에서 법학박사. 1961년 뮌헨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1964년 뮌스터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 통과. 1964~6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1969~1977년 빌레펠트 대학 교수. 1977년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공법, 헌법사 및 법제사, 법철학 담당 정교수. 사회민주당의 법정책 이론가. 1983~1996년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역임. 현재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명예교수.

요제프 이젠제 (Josef Isensee, 1937- )
힐데스하임 출생. 프라이부르크, 빈,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 후 1961년 뮌헨 대학에서 제1차 사법관 국가시험합격. 1966년 뮌헨 대학에서 제2차 시험 합격. 1962~1970년 에어랑겐 대학에서 연구 조교와 사강사. 1972년 Walter Leisner의 지도 아래 교수자격 취득. 1972년 자르브뤼켄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어 1975년까지 재직. 1975년이래 본 대학 정교수와 법대 학장을 역임한 후 2002년 정년 퇴직하였다. 독일 국법학자협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클라우스 슈테른 (Klaus Stern, 1932- )
뉘른베르크 출생. 에어랑겐과 뮌헨 대학 수학. 1956년 뮌헨 대학에서 마운츠와 엥기쉬의 지도 아래 [연방헌법재판소의 법률해석과 해석의 원칙들]로 박사학위 취득. 교수자격논문은 1961년 뮌헨 대학에서 [경제헌법과 에너지 경제법]이 통과되었다. 그동안 사법관 국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55~1961년 조교와 사강사를 역임한 후 1962년 베를린 자유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1966년부터 1997년까지 쾰른 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 퇴직하였다. 1976년부터 2000년까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을 겸임하였다.

로베르트 알렉시 (Robert Alexy, 1945- )
올덴부르크 출생. 1965년 아비투어를 마친 후 1965~68년 군복무를 필하고 중위로 제대하였다. 1968~73년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랄프 드라이어의 지도 아래 [법적 논증이론]으로 1976년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84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기본권의 이론]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하였다. 1985년 레겐스부르크 대학의 공법 및 법철학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1986년이래 킬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크리스티안 슈타르크 (Christian Starck, 1937- )
브레슬라우 출생. 킬, 프라이부르크,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법학, 역사학 그리고 철학 수학. 1963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69년 같은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 통과. 1971년부터 괴팅엔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법문사 홈페이지(바로가기 http://www.bobmunsa.co.kr/book/view.asp?num=2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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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는 로스쿨 1기생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그동안 질질 끌었던 변호사시험 합격자 결정 방법에 대해 최종적으로 확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변협에서는 총 정원의 50%로, 법무부는 응시자의 50%로, 로스쿨학생협의회는 응시자의 80%로 합격자 정원을 정해야한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즉, 변협안에 따르면 현행 사법시험과 마찬가지로 1000명을 선발하는 셈이 된다. 법무부안에 따르면 1천명에서 시작하여 매년 응시자에 따라 합격자가 늘어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에 비례하여 탈락하는 자도 누적된다. 로스쿨학생협의회의안에 따르면 일부 탈락자들을 감안하면 합격률을 보장하여 자격시험화 할 수 있게 된다. 이 안들 중에서 어떤 것이 채택될지가 향후 로스쿨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로스쿨학생협의회 쪽에서 단체행동을 보일 정도로 반발하는 것은 법무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법무부는 검사로 구성된 조직으로서 변협과 장기적으로는 직업적 이익을 같이 하는 집단이다보니 법무부의 분위기가 변협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 법무부는 사법시험 정원제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변협의 입장을 고려하여 획기적으로 정원을 늘리지 않았던 선례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법무부의 운신의 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렇다면 변호사 시험 합격자 정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법시험을 운영해 오던 법무부에게 당 업무가 맡겨진 이상 예정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법무부는 로스쿨이 조기에 파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문제를 미뤄왔던 것이고, 피해는 고스란히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로스쿨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것을 로스쿨 학생의 이기주의로 치부하기에 앞서, 과연 법무부가 로스쿨에 대한 사법개혁 취지를 고수하고 이행할 수 있는 집단인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심각하게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로스쿨 정책은 노무현 정부 하에서 법무부 장관에 소위 정치인들이 기용됨으로써 추진 가능했던 공약이었던 것이었기에, 현 정부들어 다시 검사 조직이 된 법무부로서는 직역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변호사시험 합격자 정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경인일보



로스쿨 도입의 정당성의 유무를 넘어, 최소한 사법시험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개혁을 시작한 것이라면 우선 그 취지에 맞는 운용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실질적으로 변호사 수의 획기적 증가, 변호사 시험의 자격시험화 등은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로스쿨이라는 이름의 사법시험이 반복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스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였기에 도리어 사법시험보다 더 비효율적인 제도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법무부는 변호사 시험 합격자 결정 방법을 정함에 있어 대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중요한 제도의 변경을 왜 그렇게 시급하게 처리했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일본 제도의 수용이 쉽게 이루어지고, 그 문제점도 유사하게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로스쿨 도입의 문제도 이와 판박이이다. 그러나 일본만 하더라도 로스쿨 도입까지 우리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검토하였으며, 우리와 달리 변호사 정원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었기에 현재의 타협적 제도 운영에 대해 크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는 로스쿨 도입 자체가 사법시험의 폐쇄성과 합격자의 일부 학벌 편중을 시정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일본식 제도 운영으로는 도무지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목표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식으로 로스쿨을 시행한 것은 이미 파행을 예정한 것이었다. 도대체 아무런 대비 없이 왜 이를 감행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에도 분명한 책임이 있음을 밝혀야 한다. 그들의 이상이 옳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급하게 이를 추진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제도가 형성되었고, 이제와서는 일부만의 개혁 성과라도 지키기에 급급하다보니 발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세 싸움으로 타협하기 일쑤인 방식을 자초하게 되었다.

더 근본적인으로, 과연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는 변호사 등의 법조직역을 어떻게 바라보았기에 로스쿨 도입 등의 해결책을 내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단지 특권적 직업이기에 이를 해체하는 것이 목적인가? 그래서 정원수를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참여연대 쪽 인사들의 칼럼을 보면 이런 표현이 많다. 변호사는 자격에 불과하므로 자격시험화하여 특권을 없애고, 정원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변호사 질 하락은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한다. 과연 이 말이 참여연대와 같이 진보적 단체에서 해왔던 말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왜 변호사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이렇게나 시장주의를 신봉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는 상법상 상인이 아니다. 즉, 쉽게 말하면 변호사는 영리추구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기에 의무적으로 대한변호사협회라는 공공단체를 구성하고 자동 가입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공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는 소송과 같은 공적 사무를 단지 시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법제에서는 변호사를 절대 시장주의에 개방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참여연대가 시장주의적 방법으로 법조직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체계정당성에 반하는 것으로서 해결책이 무엇인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변호사 직역의 공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로스쿨로 인해 앞으로의 법률서비스는 가격이 낮아질 것인가? 시민의 변호사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질 것인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이는 단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미미한 효과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미 사법시험 하에서 변호사 시장도 학벌과 경력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시장주의에 의할 때, 과연 시민들이 자신의 재산과 자유가 걸린 문제를 쉽게 아무 변호사에게 맡길 수 있을까?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서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판사를 거쳐 개업한 변호사와, 동일한 조건에 로스쿨을 나와서 판사를 거쳐 개업한 변호사가 있다면 평가가 같을까? 법조직역의 보수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이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 로스쿨이 완전 정착하고 수십년이 지나지 않는 이상 변호사 시장의 더 극단적 양극화가 일어날 뿐이다. 따라서 시장주의적 방식을 해결책으로 제시할 것이 아니라 변호사의 공익성을 강제할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스쿨과 같은 제도를 만들었다면 로스쿨 졸업생들부터 상당수를 공익변호사로 채용하여 저렴하고 질좋은 서비스를 국가 혹은 공법인에서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로스쿨 입학금 자체를 국가가 지원하여 로스쿨 졸업생들은 의무적으로 수 년간 공익활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방안은 어떨까? 어렵지 않은 법률분쟁에 대해서는 변호사들이 할당을 받아 처리하는 공영제를 운영하면 어떨까(버스공영제와 같이)? 이러한 공익성의 보완이 담보되지 않고 다수의 변호사를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현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항상 지적하였던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미국식의 로스쿨 제도를 도입할 것이 아니라, 독일식의 사법시험을 도입하는 것도 충분히 검토했어야 했다. 현 제도는 전문대학원을 소수 대학에 허용하면서 엄청난 등록금 인상과 오히려 학벌 특혜가 고착화되었다. 미국식 로스쿨 제도는  매년 로스쿨 순위를 발표하여 그에 따라 졸업생들의 장래가 결정되는, 그 자체로 줄 세우기와 친한 제도이다. 그럼에도 이를 학벌 편중을 위해 도입했다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SKY법학과를 대체하는 차기 학과가 대두된지 오래이다. 또한 로스쿨은 사법시험보다 더한 진입장벽이 되어 계급 고착화 현상이 우려되고 있다. 이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단지 장학금 확대가 아니라, 등록금 인하와 로스쿨 확대에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다.

반면 독일식의 사법시험은 법학과의 학부 과정에 이어 실무 과정 등의 기간을 붙여 학부 졸업생은 누구든지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또한 졸업생도 정해진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충실히 따라오면 누구든지 합격할 수 있는 자격시험이기에 특별히 무리한 준비나 비싼 학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학부를 포함하여 5, 6년의 교과과정으로 확대하여 로스쿨을 학부 내로 편입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학 수업의 파행을 막고 비용도 훨씬 저렴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예일 뿐이다. 방법은 많이 있다. 문제는 로스쿨이 능사는 아니었고, 현재와 같이 파행이 예견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랬다는 점이다.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이지만 앞 길이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안타까운 것은 로스쿨이 설치된 학내에서는 기존의 법대생과 로스쿨 학생이 나뉘어 반목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서로에 대한 도를 넘은 비방과 모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변호사 시험의 정원제 문제까지 터져나왔을 때 과연 로스쿨이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겠는지는 의문이다. 실제 학생들의 자퇴 동의서 제출 정도만 보아도 상당수가 이미 로스쿨의 매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법시험 출신과 로스쿨 출신의 실력 비교에 대해 이러저러 할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이미 비이성적인 논쟁으로 전락했다. 부디 같은 직역에 종사하려는 자들로서 예의를 지키고 법률가로서의 언행과 품위를 지켰으면 한다. 그리고 정말 로스쿨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를 기원한다.


- 2010년 나봇의 포도원,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12월 1일, 아직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 이 날,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체온과 날숨이 뒤섞여 뜨겁게 느껴진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이런 자리를 미리 마련하지 않았던지. 바로 홍대의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열린 “두리반과 함께 하는 기독인 연합예배”에서였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의 사람들의 열기, 몇 개의 전구가 만들어낸 어두운 빛, 이런 것들이 합쳐져 작은 흥분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모인 초대교인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올해 4월 초까지는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예배가 두리반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채림 ·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두리반보다 더 외로운 곳으로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예배가 뜸하던 즈음에 성공회교 한용걸 신부님께서 외로이 매주 목요일마다 촛불 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전등도 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빛나는 몇 개의 촛불을 사이로 민중가요와 성가곡을 넘나드는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 안종녀 집사님께서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 예배만 드리면 눈물이 나더라고 쓸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두리반에 이번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래봤자 8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뿐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채림 집사님께서는 홍대 인디밴드들의 연합 공연 이후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감탄하셨습니다. 의자를 50여개를 깔아놓고도 뒤에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문 밖에서 예배드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번 자리는 통일시대평화누리, 새벽이슬, IVF사회부가 연합해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50여명을 예상하고 준비한 자리에 차고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이 두리반에 대한 애타는 죄송함이 많았던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예배는 유채림 집사님께서 기억을 복기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12월 24일 도시공항철도 역사 공사 지역에 편입된 두리반은 강제 철거를 당했습니다. 평생 모은 돈으로 겨우 연 가게를 포기할 수 없다는 안종녀 집사님의 눈물과 분노가 겁쟁이 남편을 움직인 동력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끝나가는 밤에 공사 가림판을 뜯고 들어가 “내 가게”를 되찾았습니다. 그들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의 대상도 아니어서 영업손실보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달랑 이사비 300만원을 받고 나가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들은 이 억울함 때문에 지난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다다라가는 지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채림 집사님은 작가이셔서 그런지 그들의 지난 투쟁의 이야기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 싸움입니다. 즉, 형이상학적 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두리반은 이기주의나 억울함의 감정을 넘어선 공간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두리반은 오늘날 철거민들에 대한 이 사회의 잔인한 공격을 대표하는 곳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얼굴을 한 제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전이 불법적으로 단전을 하여서 무더위 속에 상한 음식으로 여름을 나야 했을 때도, 이제 추운 겨울이 다가와 난방을 걱정해야 하는 때에도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정다정


이에 대한 화답으로 구교형 목사님(성서한국 사무총장)께서 다니엘서 4장 19-27절 말씀으로 “내가 선 자리를 바로 인식하라!”는 선포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관점에서 느부갓네살의 자리가 어디인지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26절), 그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27절)입니다. 설교의 말미에 이 정권에 불의가 가득한 것은 우리가 공범인 때문이며, 인간의 법이 무너진 곳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의지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달구질을 하셨습니다.

ⓒ 정다정

 

이 시대의 불의가 중단되도록, 그리고 두리반에 위로가 있도록 기도할 때에, 고조되는 기도의 목소리들과 함께 참석자들이 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두 집사님을 축복하며 기도할 때, 행여나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기라도 할까봐 높이 손을 뻗어 하나님의 축복의 방향을 고정했습니다.

철거민의 눈물이 시작된 개발주의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용산과 두리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개발 입법이 얼마나 철거민들의 보호에 대해서는 무용한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헌법은 제23조 제3항에서 공익사업에 있어서 재산권의 수용 등이 있을 때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이를 완전한 보상이라고 해석합니다. 완전한 보상이라면 당연히 철거되는 한 점포로 하여금 인근에 다시 점포를 열어 사업구역과 단골 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77조에서는 단지 영업이익과 이전비용을 “참작”하라고 권유할 뿐입니다. 그래서 용산의 세입자들은 망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두리반은 공익사업이 아닌 민간사업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권리마저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인간의 관계이니 서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 작금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철거 용역이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철거를 강행해도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두리반의 싸움이 이기주의일 수 있을까요? 성경이 나봇의 개인적 사건을 들어 시대적 보편성을 갖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두리반도 우리에게 그러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사5:8) 개발주의야말로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이기주의입니다. 불의한 자본과 탐욕은 두 집사님의 거처를 좁은 건물로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의 활동과 소문들은 전국을 향해 퍼져 날리고 있습니다. 마치 사단이 예수를 좁디좁은 나무 위에 제한하였지만, 도리어 그 보혈이 온 만물의 구원을 위해 흩뿌려졌던 것처럼, 두리반은 세상의 자유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두리반을 찾아 해방의 기쁨을 누리려는 많은 홍대의 인디밴드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은혜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과 정의로 불의와 탐욕에 맞서시기로, 형이상학적 전투를 벌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 다과로 시루떡을 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기쁜 날도 멀었는데 떡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잔치와 같았습니다. 함께 떡을 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두리반에서 만든 떡을 떼는 기쁨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이 글은 기독언론 "더보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www.thevoice.kr/news/articleView.html?idxno=92>


나같이 문화 문외한에게도 문화를 즐기게 해주는 TV 프로그램들이 있다. 클래식 오디세이, TV 미술관, 책 읽는 밤 등등. 개인적으로 인디 밴드들이나 유명 연주자들의 곡을 들을 수 있는 EBS 스페이스 공감 애시청자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에 고급문화라는 것이 점점 보편화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서 매체들이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시간대가 자정을 넘기는 것이 일쑤라 그 의도가 실현되기에는 요원하다만...

얼마 전에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며 성가대의 성가곡에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호른까지 참여해서 성가대의 규모에 비해 화려한 반주에, 성가대원들이 열심으로 준비했던지 유달리 뛰어난 화음까지, 거의 찬양이 끝나고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 주변에 소위 "고급문화"라는 것이 산적해 있는데- 까놓고 말하면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모든 예체능 과목들은 고급문화가 아니었던가 - 나는 너무 무심히도 잘 참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무를 즐겨한다는 한민족인 나는, 이제부터라도 종합예술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시금 다짐,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고급문화"가 아니라 "고전문화"가 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취향과 선택이 넓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네 슈퍼가게 아저씨가 오페라 광팬이고, 문방구 아주머니가 모던락을 흥얼거리며, 동네 꼬마에게 우리 동네 미술관을 소개해줄 수 있다면... 이런게 꿈이 아니길 빈다.

며칠 전에 클래식 오디세이를 보다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실황을 보고 쇼크를 먹고 동영상 하나를 올려보려고 이렇게 글을 쓴다. "여제"라는 말이 어찌나 잘 어울리고 멋진지...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소장연주가를 도우며 여러 사회참여적 행사를 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강한 피아노 연주법만치나 문화의 힘은 강하다.











로마서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에서부터 유래되어 개혁주의자들에게 전수된 전통적 관점과 20세기 후반의 일단의 신학자들에게서 개진된 새로운 관점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이 글은 『로마서(WBC주석), 제임스 던-새로운 관점』, 『로마서의 신학적 강해』, 더글라스 무-전통적 관점, 『로마서 듣기』, 최갑종-전통적 관점 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우선 전통적 관점에서는

1. 로마서는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롬 1-4장이 핵심이다.
2. 그 구원은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비판하기를,

1. 초대 교회 당시에는 내관적(introspective) 경향이 없었으며(즉, 개인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며), 이는 근대 이후 서구 관점에서 로마서를 보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다. 대신 바울은 당대 초대교회에 압도적인 이방인의 수적 우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서의 핵심은 9-11장이다.
2. 이신칭의의 교리는 루터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며, 유대교는 전통적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적 포섭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대신 유대교가 강조한 것은 그 구원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율법을 실천할 것이 강조되었다(언약적 신율주의-율법주의가 아님).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한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서 새로운 관점이 제시하는 바는 전통적 관점이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에 집중해서 교회론적-공동체적 관점을 도외시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믿음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행위의 문제를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새로운 관점은 로마서 읽기에 있어서 실천론적이고 사회학적인 함의를 가져옵니다.

이에 대해서 더글라스 무는 전통적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의 일부를 수용하는 절충적 태도를 보입니다.

1. 로마서가 구원의 문제보다 민족의 문제를 중심으로 삼았다기 보다, 로마서의 전반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후반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 관계를 다룬 것으로서, 후자는 전자에 종속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2. 전통적 관점에서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로 오해한 것은 오류이다. 그러나 분명 유대인들은 율법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바울이 비판한 율법은 단순히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하는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의 무의 관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서 로마서를 읽을 때는 실천론적이고 사회학적인 통찰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관점이 제시하는 해석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Herode Theater - Acropolis - Athens
Herode Theater - Acropolis - Athens by christophandr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혁신적 정체로서의 민주정. 소규모 공동체, 경제적·군사적 독립성이 주요 요인. 이는 공동체 규모, 정치적 이질성이 민주주의에서 요주의 문제임을 나타낸다.


2. 고전적 민주주의는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이 특징. 즉, 인민이 공권력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 그래서 공무와 공동선에 사생활을 종속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체 우위의 강제적 사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 이점에서 자유주의적 비판은 무의미 - 시민 각자가 그러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이 자기완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율적이었다. 치자와 피치자의 완전한 일치가 특징.

그들은 상이한 자들 간의 숙의를 존중하고 결과에 권위를 부여. 즉, 법의 지배, 절차적 정당성, 법률의 합법성 검토(오늘로 치면 합헌성일까?) 등을 인정. 또한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기를 추구했으며, 폴리스에서 자신의 자리를 적절히 실현하는 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분석하기를, 고전적 민주주의 모델은 자유와 평등이 불가분적으로 얽혀서 발생한 정체이다. 자유는 하나, 교차지배, 둘, 자기결정권을 의미. 교차지배를 위해서 통치에 있어 산술적 평등을 보장해 준다(금전 보수, 보통선거, 기회균등). 따라서 평등은 자유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당연하고, 본인도 지배자가 될 수 있는 한 이를 제한한다고 큰 위험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고전적 민주주의는 자유를 의미하며, 자유는 엄격한 정치적 평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반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아테네의 고전적 민주주의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3. 아테네의 민회는 전체시민으로 구성되어 주요 의제를 결정하기 위해 자주 열렸다. 만장일치와 합의가 이상이었지만, 보완책으로 다수결에 따른 투표를 두고 있었다. 의제 설정을 위해서는 비교적 소수인 500인의 평의회가 있었고, 평의회는 50인의 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 법정도 민회와 유사했으며, 권력이 독점되지 않고 책임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었다.


4. 그러나 고전적 민주주의는 성인 남성의 것으로서 철저히 노예제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시민의 전제정이었던 것. 또한 아테네 민주주의는 소수 명문가에 지배되기 쉬웠고, 그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운용되었다. 이에 따라 민회의 결정은 충동적이었고 비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아테네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장기간 번영한 것은 정복국가로서 물질적 이익이 공유되었기 때문.


5. 플라톤의 비판.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를 꾀하는 것에서 오는 본질적 모순. 하나, 민주주의는 현자를 우대하기보다, 대중적 평판을 우대함으로써 자멸. 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권위의 유지나 질서와 양립 불가능. 왜냐하면 자유는 방임을 낳고, 이는 사회 통합을 해치며, 공동선과 정의는 불분명해지기 때문. 이 때 어떤 파벌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참주가 될지라도 그는 철인이 아닌 한 이기적 통치를 행할 것.

플라톤이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공동선이란 객관적인 것으로서 현실과는 무관한 이상이 있다고 보기 때문. 또한 개인과 국가는 유기적 통일체로서 개인이 노동분업에서 정명(正名)을 지킬 수 있어야 정의와 공동선이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조화롭게 통합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 점에서 17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전통과 단절-.

고전적 민주주의 모델과 그의 비판은 근대 서구 정치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치사상가의 압도적 다수는 민주주의를 바람직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 한편 아테네는 제국이 등장하는 시기에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약점, 즉 사회적 불안정으로 인해 권위주의적 국가들에 종속되고 말았다.


<아...>


1. 고전적 민주주의는 “고전적”이라는 명칭과 “고대”라는 시기에서 오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정체에 대한 매우 복합적인 사고를 진행시켜 얻어낸 결과였다. 이는 오늘날 민주주의에 공공선의 중요성, 개인과 사회 및 국가의 관계, 숙의와 민주적 권위의 중요성, 자유와 평등의 관계, 통치제도와 책임성의 문제 등 복합적인 영감을 던져준다.


2.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의 약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적 영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생활의 광범위한 비민주성이 긍정되어야 한다는 점. 이러한 물질적 기반 없이 공적 영역에 헌신할 수 없다는 유물론적 발견은 매우 중요. 이 점에서 오늘날 급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요구하는 셈. 그러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민 대중의 엄청난 노동헌신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또한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편에서 확산된 이유를 설명해줌. 한편 이러한 물질적 기반이야말로 시민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수단.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민주주의에의 헌신을 방해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는 점을 정치학적으로 인식해야 함. 후속 연구로서 사회학에서 빈부격차와 국민적 동질성을 살펴볼 필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으면 우리는 이건희 회장과 같은 나라에 살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는가? 가능한 논의? 오늘날 국민적 동질성은 칼 슈미트 식의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기보다 정치에의 헌신 여부로 가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3. 플라톤의 비판은 자유와 평등의 약점을 지적. 평등은 지혜를 무시하며, 자유는 권위와 질서를 무시한다는 것. 문제는 그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이라는 점.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파급력을 갖고 중요한 결단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문제. 플라톤은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현자의 덕성으로 해결하려고 함. 즉, 정치적 영역의 자유와 평등은 강력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물론 플라톤은 기타 개인적 영역의 자유를 인정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깊이 고찰하지도 않았음. 논외.) 오늘날 정치적 자유와 평등도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었기에 이를 일관하여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예컨대, 진입의 자유와 평등인지(정당 가입, 입후보, 공무담임), 행사의 자유와 평등인지(정당 활동, 의사표현, 선거, 투표) 등등. 물론 이 구분도 명확하게 나뉘어 지는 것은 아님. 그럼에도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고민할 때 이러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함의를 제공. 중요!
또한 정체의 안정에 있어서 권위가 중요하다는 점. 무엇을 권위로 둘 것인가는 공동체의 합의와 문화의 문제. 다수의 합의를 권위로 할 것인지, 숙의에 의한 결과나 과정 자체를 권위로 할 것인지. 예컨대, 미국은 다수의 합의에 권위를 인정하는 문화. 선출직에 권위 부여. 권위로 인정된 부분은 이를 되돌리기 위한 깊은 논의와 심대한 문제제기가 필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무엇이 권위인가? 대통령의 중요공약도 숙의되지 못한채 남발되는 현실. 대운하 사업이 표류하고 어거지로 추진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권위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

4. 역사적으로 많은 정치사상가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고, 어떤 점에서 권위주의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그들이 본 민주주의가 적었기 때문 아닌가? 어쨌든 세계는 상당부분 민주화되었고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의 욕을 먹으며 개량되었다. 그들이 수 천 년에서 수 백 년 후의 정체를 보고 비판했다면(물론 현실을 보고 비판한 것이었지만), 우리도 민주주의 자체보다 최소한 수 십 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며 큰 안목의 정체를 비판할 필요가 있겠다.